1935년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도입돼 일반화된 풀뿌리 민주주의가 한국에서 되살아난 게 1991년 일이다. 원래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시·읍·면의회의원 선거부터 시작됐으니 역사가 짧지 않다. 부활 기준으로 31년이라는 연륜을 지니고 있음에도 지방분권과 균형발전, 주민 참여 활성화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건 실망이다. 지방자치의 본래 목적이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몇몇 긍정적 변화의 의미마저 가려졌다. 그런 사이 지방의 중앙정부 종속성은 되레 강화됐고, 지방선거는 중앙 정치의 놀음판으로 전락했다.
지선의 정치적 함의가 크지 않다는 게 아니다. 5년 만에 권력을 탈환한 국민의힘으로선 지방 권력 장악이 발등에 불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앞으로 2년 더 의회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지선을 이기지 못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0.73%포인트라는 초박빙 차이로 고배를 든 민주당 입장에선 지선 필승으로 활로를 찾아야 할 군색한 처지다. 지선이 윤석열-이재명 대선 2라운드가 된 배경이다.
지선이 됐건, 총선이 됐건 투표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못 살겠다 갈아 보자'-'갈아 봤자 별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슬로건에서 그 속성을 본다. 대한민국 헌정사를 통틀어 가장 명쾌하고 강력한 정치 구호였던 이 주장은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었고, 투표장으로 가게 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반면 지선 본 투표일인 오늘, 눈에 쏙 들어오는 캐치프레이즈는 보이지 않는다. 여야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속에 한 표를 행사해야 할 유권자들 중 내키지 않는 이들이 없지 않겠다.
애초 공정한 룰의 '평평한 운동장'을 만드는 데 눈길을 주지 않은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말 많고 탈 많은 교육감 선거 제도를 보자. 학교운영위원 참여의 간선제에서 지난 2010년 직선제로 수술했지만, 우려대로 세 번째 여야 대리전이 전개됐다. 직선 교육감들이 줄줄이 각종 비리에 연루돼 사법 처리되는 흑역사도 물릴 만큼 지켜봤다. 기초의원 정당 공천제는 공당의 검증을 거친다는 순기능에도 실제로는 사천화(私薦化)되면서 부작용을 양산했다. 정치권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례들이다.
그러다 보니 지선 현장 곳곳에서 블랙 코미디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특정 정당이 지배하는 영·호남에선 무투표 당선을 따 놓은 출마자가 수두룩하다. 또 온갖 이름의 수당을 약속한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들을 나열하기 숨찰 정도로 포퓰리즘이 극성을 부렸다. 안 그래도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가 지역적·정치적으로 연고가 없는 곳의 국회의원 보선 후보로 '방탄 출마'한 판이다. 이런 풍토에서 정치 신인이나 소수자가 설 무대는 없다. 여기에 정쟁과 유권자 혐오감이 더해지면 정치 후진성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이 있다.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투표를 해야 하는지 이보다 명징하게 제시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공약이나 정책 점검이 까다롭다면 공보물의 전과 기록만이라도 확인한 뒤 투표장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성범죄, 사기 같은 질 나쁜 이력의 후보를 배제하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고 적극적인 시민의식이 필수다. 그래야 생활 정치와 내 삶을 바꾼다. 6·1 지선이 또 한 번 국민 농락 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건 유권자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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