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고장난 기억회로

김아가다 수필가(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

김아가다 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
김아가다 시니어문학상 대상 수상자

얼마 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생을 좀 했다. 다른 사람은 일주일쯤 앓았다는데 거의 두 달간 기침을 했다. 친구가 보신을 시켜준다면서 포천계곡에 데리고 갔다. 고로쇠 약수로 푹 삶은 토종닭 백숙을 먹고 나니 힘이 절로 생기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뱃속 가득 충만함을 느끼며 봄나들이를 즐겼다. 장미가 만발하고, 색색의 양귀비가 축제를 벌이는 계절의 여왕 눈부신 오월이었다. 꽃 잔치에 눈 호강을 하면서 부근의 유적지와 문화재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시장기가 몰려왔다. 친구가 저녁은 간단하게 먹자고 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전에 먹은 점심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고 해야 할까. 백지상태가 되었다. 친구들은 장난으로 그러는 줄 알고 맞장구를 치면서 놀리기도 했다. 내가 심각하게 말하자 그때서야 낮에 백숙 먹은 것 기억나지 않느냐고 했다. 맛있게 먹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는 것이다. 생각나지 않는 것을 고민한다면 정상이라고 했다. 치매에 걸리면 고민이 없다고까지 했다.

집에 돌아와 기억을 되살려 노트에 기록하였다. "포천계곡 닭백숙을 먹다." 그날부터 오전에, 오후에. 무엇을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붙들기 위해 하루의 일상을 꼼꼼하게 적어 나갔다. 시간이 흐르면 기록하는 일 자체도 잊어버릴 수 있겠지만, 기억회로의 이탈을 막기 위한 나만의 처방이고 몸부림이라고 할까.

나는 망각이라는 단어를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있고, 경험한 것을 다 기억하면 뇌가 전부 수용하지 못하니까 쓸데없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는 축이다. 그런데 막상 내게 닥친 그 일로 우울해졌다. 건망증과 치매는 개념 자체도 다르지 않은가. 다음 날 병원에 갔더니 기억력 감퇴는 바이러스를 앓은 환자들의 일시적인 현상이란다.

우리 몸의 고장 난 회로를 재생시켜 줄 의학계의 획기적인 논문이 발표되었다. '게놈'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유전체학이라 하고, 한 생명체의 유전자 전체를 파악하는 것을 '게놈 프로젝트'라 한다. 인간의 게놈을 해석하게 되면 의학, 약학, 생물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무엇보다 기억회로를 재생시키는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면 좋겠다. 혈관성 치매의 진행은 막고 있지만, 현대 의학으로 완치나 재생은 어렵다고 한다.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도 모를 병에 걸린다면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지 않겠는가. 총명탕이 좋을까, 뇌 영양제를 먹을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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