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수성도서관 시각장애인실에서 1년간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이곳 도서관의 이용자는 인쇄도서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나 CD 또는, 점자도서를 택배로 대출하고 반납하는 우편서비스를 이용하는 시각장애인들이다.
바람이 점차 서늘해지던 11월의 어느날, 도서관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한 이용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분의 이런저런 사연을 알게 되었다. 시각장애를 가졌다고 모두가 점자를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며, 그분은 성인이 되어서야 점자공부를 시작하였고 아직은 잘 읽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최근 점자를 익히면서 한글 점자를 만든 박두성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고 했다. 만약 책이 있다면 빌려 점자 읽는 연습을 하고 싶은데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 책은 '점자로 세상을 열다',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며, '훈맹정음'을 만드신 '박두성'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이날 우연히 나눈 대화로 '본다'라는 평범한 시각 능력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되고 수많은 책들 가운데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는다'는 당연한 행동들도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을 사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이 접할 수 있는 도서는 전체 출판물의 10%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책 중 일부만 점자출판사에서 점자책으로 출판하는데, 그마저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시각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책을 바로 읽을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책을 음성으로 듣는 방법에도 큰 불편이 따른다. 시각장애인실에서 이용자의 희망도서를 녹음 제작하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긴 시간을 기다리려야 하는 것이다. 봉사자가 녹음하고, 편집 후 제작 완료까지는 책에 따라서 6개월에서 길면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당시 나는 어설프게나마 점자를 익혀 온 터라, 그분의 사연을 듣고서 그 책을 직접 제작해드리고 싶었다. 페이지 수도 많지 않아서 바로 책을 구해 컴퓨터로 글자를 치기 시작했다. 표지까지 그럴듯하게 만들고, 작성한 본문들을 점자로 변환해 오류들도 점검했다. 인쇄본의 페이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점자로 변환하니 두 권에 달하는 점자책이 되었다.
한 장 한 장 출력한 점자 종이들을 일일이 접고 풀칠해 드디어 책으로 만들었을 때의 뿌듯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쾌감까지 느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나의 점자책, 과연 이 책이 점자 공부에 도움은 되었을까. 어설프게 만든 그 책을 끝까지 잘 읽었는지, 읽다가 점역 오류로 인해 혼란을 겪지는 않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기에 시각장애인들이 교육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묵묵히 점자에 일생을 바친 박두성 선생님께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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