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투자금 반환 패소에 상대방 변호사 찾아가 범행

신천시장 인근 주상복합개발사업 투자했다 5억여원 못 돌려받아
2심 앞두고 승소한 상대방 변호사 사무실 인화물질 들고 찾아 범행

9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서 화재가 발생해 5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대원들이 희생자를 수습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9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서 화재가 발생해 5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대원들이 희생자를 수습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9일 오전 10시 55분쯤 대구 수성구 범어동 법원 인근 건물 화재로 7명이 사망한 가운데 방화 용의자 A씨가 재건축 투자사업과 관련한 송사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정황이 드러났다. 피해가 발생한 건물에 자신이 패소한 사건의 상대방 변호사가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과 법원, 대구 변호사업계 등에 따르면 A씨는 2013년부터 대구 수성구 범어동 신천시장 인근 한 주상복합건물 재건축 사업에 개인투자자 자격으로 6억8천500만원을 투자했다. A씨는 이 과정에서 투자원금 약 5억3천만원을 돌려받지 못해 사업시행사와 이 회사 대표 B씨를 상대로 2016년부터 소송을 벌여왔다.

법원이 이 재판에서 사업시행사가 A씨에게 약 5억3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리며 A씨는 일부 승소했으나 정작 돈을 돌려받지는 못했다. 이 회사는 법인 계좌로 지역 상호금융기관을 이용하고 수시로 계좌를 변경해 채권 추심을 어렵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 판결에도 회사가 돈을 지급하지 않자, A씨는 B씨가 이 법인을 사실상 사유화하는 등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며 지난해 4월 대구지법에 B씨에게서 돈을 받아내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A씨 측은 B씨가 주주총회 절차를 정상적으로 진행하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회사를 운영해왔기에 B씨가 회사를 대신해 자신에게 투자금을 반환활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임직원 및 등기이사수, 주식보유비율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B씨의 개인회사에 가깝다는 논지였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해 6월 A씨의 주장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 A씨는 이 소송 1심에서 졌다. A씨는 항소를 제기해 오는 16일 대구고법에서 2심 5번째 변론기일이 열릴 예정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사무실에는 이 소송에서 B씨의 소송대리인 변호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해당 변호사는 당시 오전 10시쯤부터 재판 업무로 출장을 나가 화를 면했으나 사무실을 같이 쓰던 다른 변호사 1명과 직원 5명 등 6명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현재까지 A씨가 범행을 사전에 예고하거나 위협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A씨 주변에서는 A씨의 극단적 선택 조짐을 우려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 사건 재건축사업 한 조합원은 "A씨가 지난해 1심에서 지고, 또 불리한 증언이 나오면서 힘들어 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해 말렸는데 안타깝다. 5년 이상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직장도 잃으면서 심신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고 했다.

자신을 용의자의 지인이라고 밝힌 한 중년 여성은 "평소 성격이 모난 사람은 아니었다"며 "과거 대기업 계열사에 다녔다고 들었는데 갖고 있던 돈을 다 잃은 데 대해 억울함이 많았던 것 같다"고 했다.

재건축 관련 송사가 사건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가운데 해당 사업 조합원 20여명은 정비사업시행사를 조사해달라며 이날 오후 수성경찰서를 항의방문하기도 했다. 조합원들을 비롯한 투자자들이 시행사의 악의적인 꾐에 빠져 큰 손해를 봤다며 검찰이나 경찰이 적극적으로 나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합 측은 주상복합건물을 짓는 이 사업 과정에서 시행사가 조합원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이나 이해를 구하지 않고 불리하게 계약조건을 변경해 사업과정에서 발생한 부채를 모두 책임지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조합원 대다수가 최대 15억원에 이르는 억대의 부채를 지고 있으며 살고 있는 주택 등이 가압류된 상태라는 것이다.

9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한 빌딩에서 화재가 발생해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대원들이 희생자를 수습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9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한 빌딩에서 화재가 발생해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대원들이 희생자를 수습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현재 이 건물에 위치한 영화관은 물론, 상가 10실, 오피스텔 1실 등은 시공사 및 신탁사에 의해 공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합 관계자는 "조합원 대부분이 고령자여서 시행사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수사기관이나 행정관청이 사고 뒤에 있는 정비사업 문제도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범어동 일대 지역 법조계는 침통한 분위기에 빠졌다. 법원 앞 한 변호사 사무실 관계자는 "패소한 상대방이 전화로 언성을 높이고 말다툼 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은 상상도 못할 얘기"라며 "일 열심히 한 것이 죄는 아니지 않느냐. 가깝게 지내던 분들이라 한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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