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우정(友情)’을 소환하다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영혼을 살찌우는 고전이다. 지금도 고백록을 읽을 때마다 나의 영혼을 일깨우는 수많은 구절을 만난다. 여전히 많은 부분이 숙제로 남아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정'에 대한 고백은 충격이었다.

그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마음은 슬픔으로 매우 어두워져서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죽음뿐이었습니다. 내 고향은 나의 감옥이 됐고 내 아버지의 집은 불길한 장소로 변했습니다."

더 놀라운 말은 자기의 반쪽인 친구는 죽었는데 자기만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것. 심지어 그는 자기의 영혼과 친구의 영혼이 두 몸에 있는 하나의 영혼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도저히 반쪽 영혼으로는 살기 싫어서,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소름 끼친다고 했다. 여기쯤 이르면 자기 영혼의 반쪽이 친구라는 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다.

후일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친구와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자신을 신 앞에서 고백한다. 사실 그는 신의 자리에 친구를, 신의 절대적 사랑의 자리에 우정을 올려놓았다.

얼마 전 '한번 형제는 영원한 형제'라는 말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것을 보며, 아직도 우정이 유효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용성과 효율성이 미덕이고, 최고의 가치인 시대에 우정은 어떤 얼굴일까. 이제 우정은 기껏해야 친구를 배려하는 행위, 그리고 깊은 정서적 유대감, 여가와 취미를 공유하는 정도의 관계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는 스스로 뒷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뒷모습을 봐줄 친구가 필요한 것인가.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털어놓을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좋은 삶, 더 완전한 삶을 위해 친구가 필요한 것인가.

요즘 모든 관계의 능력은 팔로워 수에 있고, 네트워킹의 능력에 있다고들 한다. 팔로워 수가 많고,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있을수록 관계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 된다. 이제 우정조차도 관계의 능력과 치환되는 시대에 사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 시대에 우정은 이미 진부한 단어다. 그래도 여전히 우정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이 있어 다행이다. 아감벤(Giorgio Agamben)이 한 말이 긴 여운을 남겼다. "우정은 철학의 정의에 너무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우정 없이는 철학이 정말로 불가능하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우정은 무엇일까. 우정은 자기 자신을 대하듯 친구를 대하는 것. 우정은 친구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지각하는 것이리라. 이것이 곧 철학이고 우정이 아니겠는가.

우정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친구들을 많이 가진 자에게는 친구가 없다고까지 했겠는가. 그래서 정호승 시인은 "친구는 한 사람이면 족하고/ 두 사람이면 많고/ 세 사람이면 불가능하다"고 노래했던가. 한동안 나에게도 우정은 죽은 단어였고, 우정은 단지 내 필요를 채우는 그 무엇이었다. 아둔했던 어제의 나를 돌아보며, 빛바랜 단어 '우정'을 소환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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