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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시험능력주의

김동춘 지음/ 창비 펴냄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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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능력주의(김동춘 지음/ 창비 펴냄)
시험능력주의(김동춘 지음/ 창비 펴냄)

2017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0)'를 선언한, 이른바 '인국공 사태'는 한국사회에 공정과 능력주의에 관한 담론을 던졌다. 당시 가장 불같은 반응을 보인 건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2030세대였다. 이들은 면접과 시험 등 일정한 경쟁을 거치지 않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이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시험을 기반으로 하는 능력주의는 기존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특효약처럼 대접받기도 한다. 여기서 한 발 나아가 시대정신으로 추켜세우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시험성적이라는 지표만으로 능력의 순위를 매기고, 보상을 주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능력주의'를 구조적으로 해부한 신간 '시험능력주의'를 출간했다. 저자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능력주의는 실적이나 이력이 아니라 주로 대학 입시나 고시를 통해 형성된다고 분석하며, 이를 시험능력주의로 규정한다.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인 시험성적에 따른 차별이 공정하다는 게 이러한 사고의 핵심이다.

시험을 잘 치고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이 좋은 지위와 보상을 누리는 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20세 전후에 치르는 결정적인 시험이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는 인식은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 공부머리가 있는 아들이 '가문의 부흥'이란 임무를 받고 집안의 온갖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조선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이른바 '시험능력주의'가 성적 차이로 발생하는 불평등에 도덕성을 부여한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꼽은 시험능력주의의 중요한 변곡점은 1997년 외환위기다. 고용이 불안해지고 신자유주의 물결이 유입되면서 '내가 잘 났다'고 먼저 얘기해야 살아남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시험성적이 곧 능력이며, 순위를 매기는 시험이 가장 공정한 절차라는 생각은 근대 학교제도와 함께 도입된 이후 1980년대 정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학력, 시험성적, 능력에 따라 보상과 지위가 배분되어, 설사 불평등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이라는 생각은 외환위기 이후 지금 세상에 일반화된 것이다. (중략) 한국의 시험능력주의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생각과 최근에 일반화된 생각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시험이 개인의 능력을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는 척도라는 생각에는 여러 반례가 따른다. 이른바 '부모찬스'로 알려진 엘리트 세습이 대표적이다. 고액 과외나 컨설팅을 받은 학생은 명문대에 입학하고 좋은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엔 '능력'이 자식의 재능이나 노력이라기보단 부모의 경제력으로 해석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시험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지배층의 부와 지위를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얘기다.

시험능력주의의 병폐도 만만찮다. 시험에서 낙오한 이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정당화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시험능력주의는 '1등은 2등 이하부터 꼴찌까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면서 "능력주의가 거의 법칙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열등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과도한 입시와 학벌사회를 비판한 서적은 이전에도 여러차례 나왔다. 다만 이 책은 시험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맞물려 있어 완전히 극복하기는 힘들다고 인정하면서,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대학 입시'라는 1차 선발과 '노동시장 진출'이라는 2차 선발 가운데 후자를 우선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시험능력주의가 만연한 노동시장을 개선하기 위해선 최종 학력 등 한 번의 시험으로 평가되는 지표가 아닌, 실적주의나 잠재력 평가 등을 바탕으로 인재를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실적과 잠재력을 검증할 수 있는 정교한 체계가 수반돼야 한다.

이 밖에도 저자는 ▷대학의 공공성 확대와 대학서열 구조 완화 ▷법조인, 관료, 전문직의 지위 독점과 각종 특권 축소 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424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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