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독일 오페라는 바그너가 신개념 오페라 '악극'(樂劇, Musikdrama)을 창안하면서 오페라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어릴 때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는데, 15세 때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한 이후 음악에 열중했다. 그는 18세 때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음악과 철학을 공부했고, 1932년에 작곡한 곡이 게반트하우스에서 연주되어 작곡가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휘자로도 활동하게 되는데 베토벤을 존경했던 바그너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24세 때 여배우 민나와 결혼했고, 이 무렵 오페라 작곡도 했지만 상연에 실패하면서 빚에 쪼들리게 된다. 그들은 파리로 도피하여 3년간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오페라 '리엔치'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작곡한다. 뜻밖에 '리엔치'가 드레스덴 초연에 성공하면서 드레스덴의 궁정악장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는다. 이후 바그너는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낭만파적인 오페라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을 완성한다.
38살 때 드레스덴에서 발생한 5월 혁명에 가담한 바그너는 지명수배 되어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하게 된다. 그 무렵 그리스 예술을 존중하는 무용‧음악‧문학의 결합인 '악극과 연극'이라는 논문을 써서 '악극'이라는 새로운 오페라의 기준을 제시한다. 이를 전후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에 착수하여 1859에 완성한다. 이 곡은 자신의 후견인 베젠동크의 부인 마틸데와 사랑에 빠졌을 때를 계기로 하여 쓴 것이다.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상연을 위해 리허설을 시작했으나 예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이 곡이 난해하다는 평이 나올 것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가능한 평이하게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을 착수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리허설을 무려 70여 차례나 진행했지만 초연이 요원했다. 때마침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가 즉위하자 바그너를 찾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연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곡을 작곡 완수한 후 6년 만인 1865년 6월 뷜로의 지휘로 초연하게 되었다.
1866년, 바그너는 아내를 잃었으나 2년 후 그의 수제자 뷜로의 아내이자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재혼하게 된다. 1876년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의 대본을 완성하고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을 차례대로 완성해 갔다. 그토록 원하던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을 루드비히 2세 후원으로 건립하여 그 해 8월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을 상연했다. 1882년, 바그너는 마지막 악극 '파르지팔'을 완성하여 초연하고, 이듬해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그의 악극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악극의 대본을 직접 작성했으며, 예술론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이상은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이 아니라 사회 각 계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극의 전개와 심화에 있어서 주요인물이나 특정한 감정을 상징하는 관현악의 유도동기(誘導動機, Leitmotiv)를 적절히 구사하고, 기존의 오페라에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구분하여 음악의 흐름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무한선율(無限旋律)을 도입했다. 또 대담한 반음계의 사용으로 조성의 붕괴에 이르렀고, 관현악은 이전의 낭만파 음악에서 볼 수 없는 폭넓은 규모와 깊이를 가졌다. 그는 낭만주의 음악에서 출발했으나 오페라의 전통을 타파하여 연극‧문학‧음악을 종합하는 새로운 극음악인 '악극'을 창시한 진정한 근대 오페라의 개척자다.
대구시합창연합회장
댓글 많은 뉴스
"용산의 '사악한 이무기'가 지X발광"…김용태 신부, 시국미사 화제
공세종말점 임박?…누가 진짜 내란범! [석민의News픽]
홍준표 "조기 대선 시 나간다…장이 섰다" 대선 출마 선언
박지원 "한덕수, 굉장한 출세욕…차기 대통령하려 혼란 만들어"
불공정 자백 선관위, 부정선거 의혹 자폭? [석민의News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