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운명에 맞서는 방식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등장하는 두 할머니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다. 자식과 남편을 잃고 가난과 병에 쫓겨 서글프게 살아온 삶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일이 눈물겨웠다. 하지만 그들은 그 운명에 맞서기보다 그 아픈 운명을 자꾸만 돌보며 다독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올해 가을, 단편집으로 묶을 내 글들을 살펴보다가 어느 소설의 한구석에 초라하게 적혀 있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는데 설핏 부끄러움이 일었다. 벌써 10년도 더 전에 아주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소설이었다. 그때 나는 삶의 어떤 현명함을 찾고 있었기에 그토록 분노로 가득한 서사를 지어냈던 걸까? 간밤 술에 취해 내지른 고함이 무색한 아침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소설을 읽으며 내 수치심의 끝을 헤집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간디의 삶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이 잦았다. 언젠가 간디는 스스로 물레를 돌려 만든 누더기를 입고 런던을 방문했었다. 인도를 대표해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제국주의가 온 세상을 뒤덮던 격동적이고도 암울한 시절이었다. 회의의 결과는 참담했고 간디는 식민지 조국을 위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단출한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영국의 국왕이던 조지 6세는 간디를 버킹엄궁으로 초대하게 된다. 간디는 흔쾌히 그 초대에 응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간디의 옷이었다. 버킹엄궁에서 간디를 찾아온 사람의 손에는 근사한 양복 한 벌이 들려있었다. 옷을 갈아입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간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실 간디는 젊은 시절 런던에서 유학 후 변호사 사무실까지 개업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양복을 입는 것이 그리 낯선 일도 아니었다. 조지 6세는 난감한 지경이었지만 이미 버킹엄궁으로 간디를 초대했다는 소문이 런던 시내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기 때문에 환복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그 초대를 거둬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간디는 앙상하게 마른 상체를 드러낸 채 궁전으로 들어갔다. 아마 영국 역사상 그런 옷차림을 하고 버킹엄궁에 들어간 이는 간디 단 한 사람뿐일 것이다. 당시 내가 읽었던 책의 저자는 간디의 환복 거부가 제국주의를 향한 시위를 목적으로 한 행동이라는 투의 주장을 적어 놓았지만 나는 그 의견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겨우 생각해낸 단어가 '운명'이었고 비로소 그때의 나는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영국의 템즈 강변에 서서 '빌어먹을 운명아, 나 좀 내버려 둬!'라고 소리치는 인물의 삶을 별다른 계획도 없이 만들어가다가 나는 소설의 말미에 왠지 그 인물을 운명에 거칠게 맞서도록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몇 개의 문장으로 소설을 마무리했다.

'운명 이상의 삶을 바라지 않는 삶, 아픈 운명을 돌보며 다독이는 삶의 현명함, 그런 믿음이 당신을 조금은 편안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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