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남영찬의 새론새평] 거스키와 ‘8월의 크리스마스’

법무법인 클라스 대표변호사 남영찬

남영찬 법무법인 클라스 대표변호사
남영찬 법무법인 클라스 대표변호사

독일 사진작가인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의 한국 첫 개인전을 관람했다. 초기작 '파리, 몽파르나스'(1993),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카고 선물거래소 Ⅲ'(2009)와 '아마존'(2016),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신작 '얼음 위를 걷는 사람'(2021)과 '스트레이프'(2022)를 비롯한 40점을 선보였다. 북한 아리랑 축제의 매스게임을 소재로 한 평양 시리즈도 눈에 띈다. 2007년 직접 평양을 방문해 촬영한 작품으로 10만 명이 넘는 공연 참가자로 구성된 시각적 웅대함과 그 이면에서 감지되는 전체주의적 획일성이 엿보인다.

거스키는 현대 사진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는다. '사진의 속성은 지키되, 사진 그 이상'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라인강 Ⅱ'(1999)가 201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430만 달러에 낙찰됨으로써 얼마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 작가였다. 현재까지 거래된 고가 사진 30점 중 그의 작품이 무려 10점이다. 거스키의 위상을 말해준다. 엉뚱하게도 이런 거스키의 작품을 보는 동안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아날로그 사진관과 사진을 소재로 애틋한 사랑과 담담한 죽음을 그린 수작이다.

거스키의 작품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원거리 촬영, 압도적인 작품 크기, 세밀한 디테일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원거리 시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헬리콥터나 심지어 위성에서 사진을 촬영하기도 한다. 원거리 시점은 자연스럽게 압도적 스케일로 이어진다. 한쪽 변이 5m나 되는 거작도 있다. 관람객은 작품의 크기에 압도당한다. 놀라운 것은 압도적 스케일과 미세한 디테일의 공존이다. 이를 위하여 거스키는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컴퓨터로 스캔하여 편집하는 디지털 포스트 프로덕션 기법을 도입하였다. 여러 개의 이미지를 이어 붙이거나 원근을 없애고 색상을 조정하기도 하였다.

전통적 사진은 구도와 빛의 함수에서 포착된 피사체이다. 이런 속성으로 인하여 사진은 기록이나 사실의 증거로 기능하기도 하고, 추억의 매개체 역할도 한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극한으로 압축하면 2장의 인물 사진으로 남는다. 사진사인 정원(한석규 분)이 사랑이 싹틀 무렵 찍어준 다림(심은하 분)의 사진과, 정원이 죽음 직전 스스로 찍은 자신의 영정 사진이다. 각각 사랑과 죽음을 상징한다. 이 두 사진은 피사체의 당시 모습과 표정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사진에 디지털 편집 기술이 도입되면서 이러한 사진의 속성은 희석되었다. 그 대신 사진은 새로운 지평과 가치를 확보했다. 거스키는 그 대표 주자이다.

거스키의 사진전을 본 이후 한동안 그의 작품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작품에서 받은 충격이 묵직했다. 그 여파로 모 경영대학에서 CEO의 자세와 혁신에 관한 특강을 하면서 PPT 강의 자료의 결론 부분을 거스키의 '무제XIX'(2015) 작품으로 채워 보기도 하였다. 거스키의 사진 작업이 혁신의 전범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네덜란드 농장 상공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수직 아래쪽 수백만 송이의 튤립을 촬영한 것이다. 거시의 세계와 미시의 세계를 합체시켰다. 이 작품을 멀리서 볼 때는 추상화처럼 보인다. 어떤 이는 박서보의 그림이 떠오른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사물들이 얼굴을 내민다. 이 작품을 사진으로 정의할 수 있는 요소는 바로 피사체인 튤립이다.

거스키의 혁신 DNA는 어디서 왔을까. 3대째 사진사 집안의 내공에서 온 것일까, 아니면 다른 요인일까. 통상 사진 작가는 작품을 위하여 구도를 고민하고 적합한 빛의 순간을 기다린다. 반면 거스키는 최신 메거진을 읽고 사색을 한다고 한다. 거스키의 혁신은 사진 작업의 기존 통념을 거스른 데서 온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 국가 모두 혁신이 절실하다. 거스키 앞에 서면 해법이 열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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