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각 중등학교에서는 교사(校舍)난으로 노천수업을 하고 있는데 금번에는 각처에서 수용하게 되어 수업 진도의 차와 수용난으로 각 학교에서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형편인데 금번 시내 각 중등학교에서 배정받은 학도 수는 다음과 같다. ~각 중등학교 교장들의 말에 의하면 학생들의 희망대로 배정 못하였던 것은 각 학교의 수용실정과 학과 진로에 따라 하였으므로 각 학생들과 학부형의 양해를 바라고 있다.' (매일신문 전신 대구매일 1951년 3월 5일 자)
노천에서 중단됐던 학생들의 수업이 재개됐다. 학습 진도가 다른데다 학교의 교실이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 한해 전에 터진 6·25 전쟁을 피해 대구로 피난 온 학생들이었다. 경북도 교육청은 이들을 모아 개학식을 가진 뒤 수업을 시작했다. 대구여중 202명을 비롯해 경북중 147명, 신명 123명, 영남 85명, 대건 85명, 능인 85명, 계성 88명, 대륜 88명 등 대구지역 학교에 총 2천여 명이 배정됐다.
전쟁통에도 학생들의 향학열은 식지 않았다. 여기에는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는 당시의 입시난과도 맞닿아 있었다. 같은 해 경북도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졸업예정자는 5만8천500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약 3만5천100명이 중학교에 진학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중학교의 수용 능력은 겨우 8천4백50명에 불과했다. 중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 중 절반도 되지 않는 45%만이 학교 땅을 밟을 수 있을 뿐이었다.
중학교 입학은 시험지옥으로 통했다. 부정 입학의 유혹이 어른거렸다. 입시 브로커들이 설쳐댔다. 브로커들은 학교 입학을 빌미로 수험생 부모에게 접근했고 금품수수로 이어졌다. 시험지 유출 같은 세상의 이목을 들끓게 했던 입학 부정 사건이 나오는 이유였다.
입학이 바늘구멍이다 보니 그야말로 학생들은 입시전쟁을 치르고 입학했다. 이토록 어렵게 상급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은 실제 전쟁이 났어도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식의 입신양명을 바라는 부모의 욕망 또한 보태졌다.
'올해의 중등학교 입학시험은 본지 기보한 바와 같이 전국 일제히 자격시험을 실시하여 합격자에게는 학교를 임의로 선택케 한다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게 되어 학원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시험의 구체적인 것은 지금 개최되고 있는 전국 장학관 회의에서 결정을 보게 될 것인바 이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대구매일 1951년 6월 12일 자)
학교에 일어난 센세이션은 무엇일까.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자격시험으로 대체한다는 발표 때문이었다. 전쟁을 피해 남하한 학생들을 구제하려는 조치였다. 전쟁이 나기 전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학교 진학이 가능케 하려는 것이었다.
학교별로 치르는 시험 대신 전국적인 자격시험이었다.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합격증을 교부하기로 했다. 합격증을 받은 학생들은 희망하는 학교에 어디든 원서를 낼 수 있었다. 1차 지원학교에 불합격하면 2차로 다른 학교 지원이 가능했다.
입시 과열은 해방 이후에도 쭉 이어졌다. 전쟁 와중에도 그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64년의 이른바 '무즙 파동'은 입시가 사회적 이슈의 한복판에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에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다. 디아스타아제는 아밀라아제로 녹말을 엿당 등으로 분해하는 효소였다. 하지만 일부 학부모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문제의 보기로 나온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학부모들은 실제로 무즙으로 엿을 고아와 시위를 벌이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디아스타아제와 무즙 둘 다 정답으로 인정되었다. 수십 명의 학생이 원하던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몇 해 뒤에는 '창칼 파동'이 일어났다.
미술 문제 중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쓰고 있는 그림'을 고르는 문제였다. 복수정답 시비에다 학부모들이 교장을 감금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제 하나로 자식의 인생이 달라진다고 여긴 학부모들의 과잉 행동이었다. 입시경쟁의 과열이 빚은 사례였다.
전쟁이 터진 1950년 그해는 겨울방학이 없었다.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을 제외하고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방학 시기는 비슷했다. 여름방학은 7월 중순, 겨울방학은 12월 중순이었다. 하지만 연료 부족으로 겨울방학은 들쑥날쑥했다.
연료난이 닥치면 방학을 일찍 하거나 기간이 늘었다. 여름방학은 겨울방학이 늘면 줄어드는 정도였다. 경북도가 뇌염 발생으로 희생자가 생기자 여름방학을 연장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지금은 난방 연료가 부족하다고 방학이 늘지는 않는다. 입시 브로커는 유학 브로커로 진화했다. 중학 입시는 대학으로 옮아갔다. 전쟁통의 노천수업은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그제나 저제나 변치 않은 건 하나다. 입시열병에 '방학 없이 찌든 청춘' 말이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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