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중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이 제출한 국립묘지 안장 신청 건입니다. 서면으로 보내기 전에 먼저 전화부터 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영천 호국원 직원이었다.
"고인에 대하여 국립묘지 안장 대상 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한 결과 안장 비대상으로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심의위원회에서는 아버지의 병적 사항과 경찰청 기록을 공정하게 확인하였다고 했다. 공과(功過)를 따져 드물게 재심의까지 하였다. 그러나 결과가 이렇게 밖에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호국 영웅기장증을 받은 6.25 참전 유공자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 뒤인 8월에 대학생 신분으로 입대했다. 그 후 최전선에서의 참전은 물론, 전쟁이 끝나는 해 1953년 12월까지 근 3년 4개월 현역 신분이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에서는 아버지에게 '호국 영웅기장증'을 수여했다. 이런 사실로 보아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당연히 경북 영천에 있는 국립묘지로 모시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안장 신청부터 먼저 했었다.
통화가 끝났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 시신이 영천 호국원으로 갈 수 없다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급하게 아버지 유해를 부산 영락공원으로 모셨다. 그곳은 아버지가 살았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공원묘지였다.
아버지 장례를 끝내고 나서야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아버지는 국가가 인정한 호국영웅이다. 아버지가 국립묘지에 가지 못한 것이 혹시 행정상의 착오는 아니었을까? 효도를 다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겹쳐 견딜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할머니와 고모들의 얘기들도 소중한 증언적 가치로 떠올랐다.
육군본부에 편지를 썼다. 아버지 군 복무 기록 관련 자료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며칠 후 육군본부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곧 해당 부서별로 자료가 따로 갈 거라고 말해주었다. 보름쯤 지나자 자료가 오기 시작했다. 그 담당자의 말처럼 다섯 부서에서 아버지 관련 자료가 도착했다. 육군본부 법무실, 병적 민원과, 보훈지원과, 상훈 전역과, 육군기록정보관리단.
마음이 두근거렸다. 도착 순서대로 즉시 봉투를 열었다. 사안별로 질의한 내용을 해당 부서에서 각각 답장을 보냈다. 서류는 마이크로 칩으로 보관된 원본을 A4용지에 복사한 것이었다. 병적기록 서류는 세월이 오래된 탓인지 복사본인데도 누렇게 변해 보였다. '원본 불량'이란 붉은색 도장이 찍혀있는 것도 있었다.
아버지의 옛 서류들은 담당자가 일일이 펜글씨로 기록한 것들이었다. 어려운 한자로 표기된 것도 있었다.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펼쳐놓고 찾아보았다. 어렵게 파악한 사실관계 중에는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다. 전혀 몰랐던 사실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군사재판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판결문 중 핵심 부분이 있었다.
'… 본건 피고인의 신병(身病: 몸에 생긴 병)을 접하건대 피고인이 1952년 12월 중순 경 「강원도 양구 문등리 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두부(頭部)에 파편상을 입은 후부터 두통이 심하고 두부가 몽롱하여 정신이 없었다. 공판조서, 예심조서, 피의자 심문 조서 및 별지 육군본부 의무감실 군의관 육군 대위 김덕영 작성 진단서의 기재 등 본 건 기록을 통하여 피고인의 진술로 이를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참전한 전투 현장이 양구 문등리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여태까지 나는 아버지가 치른 전쟁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구태여 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단순히 "너거 아버지 머릿속에 탄피가 있다. 그것이 제대로 제거가 안 되어 늘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라는 말만 들었다 "너거 아버지가 전쟁하고 온 뒤로 말을 통 안 한다. 그렇게 똘똘한 아가 말을 안 하니 답답해 죽겠데이."하며 한숨을 내쉬던 고모의 모습도 덩달아 떠올랐다.
양구 문등리라면 6.25 전쟁 때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으로 너무나 많이 알려진 전쟁터다. 아버지가 이 일대에서 적과 교전했다는 사실을 우리 가족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50년 10월부터 중공군이 전쟁에 깊숙이 개입했다. 국군은 전 전선에 걸쳐 적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그 유명한 피의 능선 등에서 벌어진 공방전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양측의 포격이 하도 심해 능선은 물론 산 전체가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고지는 자고 나면 피아가 바뀌었다.
아버지가 부상당했던 1952년 12월 중순이면 전쟁이 겨우 소강상태로 접어든 시기였다. 그러나 손 놓고 참호 속에서 언 발을 녹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지전은 여전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백병전을 치를 때도 많았다. 수도 없이 매복을 나가고, 기습을 당했으리라. 계급이 일등 중사였던 아버지의 전투 상황도를 그려보았다.
그날따라 문등리 계곡에는 안개가 서려 전방이 온통 뿌옇게 흐렸다. 갑자기 아버지 코앞에서 85밀리 박격포탄이 터졌다. 연이어 포탄이 날아들었다. 귀가 먹을 듯한 총소리도 쉴 새 없이 났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나뒹굴었다. 처절한 신음소리가 진동했다. 아버지는 병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백여 명으로 추산되는 중공군이 아버지 부대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하들 앞에 서서 곧바로 십여 미터를 나아갔다. 아버지의 총에 맞은 몇 명의 중공군이 쓰러졌다. 그 순간 아버지의 철모가 뒤로 날아가는가 싶더니 아버지도 옆으로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야전병원이었다. 아버지 머리는 온통 붕대로 칭칭 감긴 상태였다.
종전으로 치닫던 1953년 5월 27일이었다. 아버지는 제1 보충대대로 파견근무 명을 받았다. 제5차 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보충대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고열에 시달렸다. 사물을 구별 못 할 정도였다.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적의 탄피가 박혀 있었다. 그 상태로 5개월이 지나도 후유증은 점점 깊었다.
아버지는 결국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했다. 판결문에서도 불합격 사유가 암시되어 있었다.
'… 규지(窺知:엿보아 알 수 있음)에 신병의 피고인은 현시(現時:지금 이때)에 인적 자원을 고도로 요구하는 국가 요청이 있을지라도 하등 군 전투력 보전에 공헌하지 못할 것이라고 사료 되어 전역함이 옳다고 본다.'
신체검사에 불합격한 아버지는 부대로 곧장 귀대하지 않았다. 홀어머니가 계시는 대구 집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부상의 후유증이 점점 심해졌다. 죽는 한이 있어도 할머니 곁에 가고 싶었으리라. 할머니의 포근한 손길이라면 어떤 아픔도 완쾌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붙들고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려 돌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병 돌보는 일에 당신의 목숨이라도 내걸 작정이었다. 며칠 후 아버지가 귀대를 서둘렀다.
"내 죽는 꼬라지 볼라거든 가거라!" 할머니가 단단히 가로막고 나섰다. 이제 가면 아들을 영영 못 본다고 생각한 할머니였다. 꿈에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어 가는 걸 봤다고도 했다.
할머니는 돈을 쓰면 군 복무를 마친 것으로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누구에게 들었다. 급하게 논을 팔아, 아버지 모르게 조치를 취했다. 할머니는 일 봐주는 사람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돈만 챙기고 입을 닫았다.
육군본부에서 보내온 자료 중에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이 나타나 있었다. 대구 대봉동 할머니 집에서 치료를 하던 중인 1953년 7월 6일 원대복귀 명을 받았다. 아버지는 본대로 귀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병 치료가 덜 끝나 소속대로 연락하지 못했다. 결국 1953년 8월 17일 자수할 때까지 42일간 아버지는 탈영 상태가 되고 말았다.
제66 헌병대에서 아버지를 신문한 조서 내용을 확인했다.
"본인은 신병으로 귀대하지 못하였을망정 과오를 반성하고 자수하였는데 신병은 아직 완치되지 못하였습니다."라는 요지의 피의자 진술이 있었다.
판결문에 의하면 '피고인의 소행은 국방경비법 제9조 도망죄에 해당함으로 유죄판결이 적법하다. 그러나 피고인이 자수한 점 등을 참작하여 주문과 같이 「불명예제대, 전 급료 몰수, 징역 1월」에 선고하였음은 타당하다'였다.
※2022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부운' 2편은 다음주 화요일(12일)에 게재합니다.
◆당선 소감…아버지의 침묵을 풀어 적은 글
여러 가지로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 고맙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니어 문학도에게 문학의 장을 마련해주신 매일신문사 제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며칠 사이에 잊고 있었는데 대상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통화가 끝나도 여운이 이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허탈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두서없이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평소 아버지를 보고 입에 자물통이 채워졌나 하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만큼 말을 하지 않았죠. 아버지가 침묵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요즘에야 깨달았습니다.
이 글은 아버지의 침묵을 풀어 적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아버지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말이죠. 저를 나무란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접수 마감 날은 모처럼 단비가 내렸습니다. 원고가 든 봉투를 들고 집 근처 보현사로 갔습니다. 마침 아침 예불을 준비하느라 불단 앞이 어수선했습니다. 일 배 일 배 절하는 동안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우산을 들고 걸어서 신문사로 갔습니다. 아버지를 업고 가는 듯했습니다.
오늘의 이 영광은 제 개인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잘 압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묵묵히 지켜봐 주신 용학 수필 신현식 교수님의 지도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4년 전에도 용학도서관에서 대상이 나왔습니다. 그 기운과 동문수학하는 우리 문우님의 관심 덕택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없이 뒤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아내의 따뜻한 위로 역시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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