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은 흩뜨려(散) 놓은 글이다. 물론 이 흩뜨림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산적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잘 흩뜨려 놓을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하고 그 교묘한 능력을 인정받을 때 비로소 작가로서의 능력이 완성된다. 그렇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산문은 적잖은 불편함을 감내해야 하는 장르가 되고 만다. 단순히 읽는 공정으로 산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산문을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산문은 어디까지나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의 1차적 기능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의 흩뜨림은 적어도 독자로 하여금 오래 생각하도록 하는 기능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문학에서의 산문은 질러가는 모양새를 해서는 곤란하다. 두르고 헤매는 글이라야 한다. 두르고 헤매는 과정 속에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 의미를 찾는 과정이 피곤하지만 재미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산문을 읽는 것은 흩뜨림의 미학을 일구는 흥미진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산문을 쓰는 작가는 '흩뜨려진 사유'로 글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글을 조금이라도 써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써 놓은 글을 우리는 낙서(落書)라고 부른다. 좋은 작가는 정리된 개념과도 같은 하나의 단상(斷想)을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 체계 안으로 집어넣고 '의도된 뒤죽박죽'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칼럼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우리의 일상은 그 인과의 경계를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만큼 뒤죽박죽이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 일상은 반듯한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정확히 만들어 '막장'이라는 평가를 피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막장 드라마' 속을 살아가는 배우인 셈이다.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칼럼은 결국 좌충우돌하는 세상의 한 단면을 작가의 독특한 생각의 틀 속에 쏟아 넣어서 새로운 '흩뜨림'을 만드는 작업일 것이다.
주가와 우리 돈의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와 기름 값은 자꾸만 오른다는 일상의 한숨이 단순한 정보로 지어져 우리에게 전달되는 글은 하루에도 수천수만 가지가 넘게 생산된다. 물론 그 글들이 가지는 유용성은 분명 있을 것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는 계기도 만들어질 것이다.
그 명쾌한 정보들의 틈에서 좀체 매만지기 싫은 일상의 이면을 찾아 그것에 빌붙은 내밀한 의미를 포착하고, 천연덕스럽게 인간과 세계를 탐색하는 사유를 흩뜨려 놓은 글이 지면의 어느 한 구석에서 조용한 빛을 내뿜는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빛이 지식과는 또 다른, 지성(知性)의 소중한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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