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대를 이어 지킨 나라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보급 왔구나."

1990년대 갓 부대에 배치된 이등병에게 짝대기 두 개짜리 일병이 대뜸 말한다. 저도 고작 몇 달 전에 온 주제에 보급이라니. 요즘이야 사용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빨리 단련시켜 군인답게 만들어야 했으니 부적절한 비유라 공박하기도 애매했다.

세계 최강 군대라는 미 해군 부대원들이 장기간 해상 훈련 뒤 육지에 상륙하고 가장 먼저 하는 것 중 하나가 달리기다. 반바지 차림으로 땅을 박차러 뛰쳐나가는 거다. 바다 위 출렁이는 갑판에서는 제대로 뛰는 게 어려웠으니 하체 단련의 첩경인 구보(驅步)에 목을 매는 것이다.

이달 13일 공군 내부 게시판에 한 병사가 실명으로 올렸다는 글이 지난 주말 기사로 소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기사는 이 병사가 "실외 아침 점호와 아침 뜀걸음은 신체적인 피로를 불러오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 제도 개선을 했으면 좋겠다. 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규정을 지속하면 규정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으니, 그 정당성을 잃을 수도 있다"고 적었다고 전했다.

합리적 기백을 표방하지만 허술한 객기다. 군인이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군대는 용도가 확실하다. 평화 유지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내가 약해 보이면 상대는 우리를 치러 들어온다. 동서고금의 교훈이다. 그렇기에 혹한기 훈련, 유격 훈련의 취지를 사병들에게 일일이 설득할 필요는 없다.

1920, 30년대에 태어난 세대는 동족상잔의 전쟁통을 겪었다. 그보다 10년 일찍 태어난 세대는 더 엄혹했다. 일본군에 속했다. 심지어 미얀마와 사이판까지 갔다. 무사히 돌아온 이가 드물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크게 겪었으니 나라가 왜 제대로 있어야 하는지 절실히 깨우쳤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대를 이어 지켜온 나라다. 지금의 20대나 그 아버지 세대인 40, 50대는 운이 좋은 편이다. 전쟁을 겪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의 20대에게 러시아에 항전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기본을 망각하면 어떤 요구까지 나올 수 있는지 본 것 같아 씁쓸하다. 이런 와중에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저문다. 나라를 지키겠다고 분연히 총을 잡았던 선대의 희생을 다시 생각한다. 국민이 발 뻗고 자려면 군인의 발이 바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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