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박헌경 변호사

박헌경 변호사
박헌경 변호사

'군주는 배, 백성은 물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오는 말이다. 정관정요는 당 태종과 위징, 방현령 등 현명한 군신(君臣) 사이에 주고받은 정치에 관한 문답을 편찬한 책이다. 그 책에서 태종의 물음에 위징은 "일찍이 옛말에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능히 배를 실어 띄울 수가 있지만 한편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진실로 백성이야말로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120년에 걸친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면서 막대한 전리품과 엄청난 토지, 그리고 수많은 노예를 원로원의 소수 귀족층이 모두 차지했고 원로원으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로마는 원로원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원로원파와 이를 개혁하려는 평민파로 나누어졌다. 평민파의 대표인 그락쿠스 형제는 호민관이 되어 귀족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자작농을 육성하려는 농지법을 통과시켜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군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원로원파는 평민파들을 무력으로 몰살시키고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을 힘으로 막았다.

그로부터 100년 후 원로원은 갈리아를 정복하고 개선하는 평민파 장군 카이사르에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에 무장을 해제하고 단신으로 로마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로원의 명을 따르면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가 죽임을 당할 것이고 원로원의 명을 거역하면 로마의 역적이 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고민 끝에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남기고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였다. 원로원파를 무찌르고 로마의 종신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을 위한 개혁적 정책을 시행하다가 부르투스의 칼에 찔려 죽었으나, 그의 계승자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팍스로마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597년 일본 수군을 무찌르고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에게 선조의 어명이 떨어졌다. 칠천량 앞바다에 왜군이 집결하여 있으니 조선 수군을 총동원하여 칠천량으로 배를 이끌고 나아가 왜군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명은 거짓 정보를 퍼뜨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몰살시키려는 일본의 계략에 선조가 말려든 것이었다. 고민 끝에 이순신은 선조의 어명을 거역하고 칠천량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순신이 역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역적 이순신은 선조가 보낸 선전관에 의해 오랏줄에 묶여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도 출정 명령을 거부하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거북선을 비롯한 100여 척의 배와 조선 수군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나아갔다가 매복한 일본군에 대패하여 조선 수군은 산산조각이 났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선조의 어명을 거역한 이순신이 100여 척의 배와 수군을 이끌고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 한강나루에 상륙한 후 한양으로 진군하여 백성의 신망을 잃은 선조의 조선 조정을 뒤집어엎었다면 그후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은 선거를 통하여 국민의 신망을 잃은 잘못된 지도자를 교체시킬 수 있고 탄핵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한순간이다. 대한민국이 새롭게 글로벌 리더 국가로 재도약하기 위해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을 항상 감시하고 지켜보아야 한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