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빈집 3546] 연재 순서
<1편>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빈집
<2편> 황폐화된 도시, 고립된 사람
<3편> 주택공급 과잉의 기원, 빈집
<4편> 있으나 마나한 빈집정비사업
<5편> 방치된 '빈집' 해법 찾아야
빈집 하나는 또 다른 빈집을 낳는다. 주민들은 마을에 빈집이 생기면 옆집도 빈집으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많은 이들이 떠났지만 남겨진 주민들은 빈집들 사이에 고립된 채 고통받고 있다. 악취와 같은 비교적 작은 불편함부터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삶의 위협까지 맞딱드리고 있다.
◆붕괴 위험에 가슴 졸이는 주민들
남구 대명2동 도시철도 1호선인 교대역 2번 출구에서 나와 몇 발걸음만 옮기면 20m 남짓한 골목이 나온다. 이 골목에는 10여개의 주택이 있지만 빈집만 4개다. 빈집 모두 대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었지만, 담장으로 올라가 어렵게나마 확인한 내부는 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낡은 모습이었다.
지난달 23일 오전에 만난 정순연(90‧가명) 씨는 60년째 이 동네에서 살고 있다. 정 씨가 사는 집의 앞집은 20년 이상 방치된 빈집이다. 지난 1990년대 말까지 사람이 살았지만, 집주인이 세상을 떠났고 자녀들마저 외면하면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됐다.
정 씨는 이 집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우려하고 있다. 그는 "비가 내리면서 집을 지탱하는 흙과 나무가 많이 약해졌을 텐데 붕괴될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정 씨 집에서 몇 걸음을 떼면 또 다른 빈집과 9년째 동거 중인 김인호(40대‧가명) 씨 부부가 살고 있다. 김 씨 역시 빈집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김 씨 집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어보니 50cm 거리에 빈집 외벽이 뻥 뚫려 있었다. 훤히 보이는 내부에는 이 집이 지어졌을 당시 자재로 추정되는 나무판과 돌 등이 떨어져 있었고, 안쪽을 볼수록 음산한 기운마저 들었다.
지난 2013년에 이사를 온 김 씨는 당시만 해도 앞집이 문제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다 4년 전쯤 빈집 지붕이 덜컹 소리와 함께 내려앉았고 흙 구조의 외벽이 무너졌다. 특히 지난해까지 골조 역할을 했던 나무가 있었지만 현재는 이마저도 부러졌다.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빈집인 탓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꿉꿉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탓인지 최근에는 그의 집 내부도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김 씨는 "비만 오면 무거운 기와에 집이 무너질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원만하게 해결돼 더 이상 혐오스러운 빈집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 '학군지'도 소용없다, 입지 안가리는 빈집…'범죄 악용'
21일 찾은 대구 북구 옥산초등학교. 이곳은 경명여중과 경명여고가 나란히 붙어있어 북구의 학군지라 불린다. 이곳 학교들에서 몇 걸음을 옮겨 보니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이 눈에 띄었다. 건물 사이 간격이 1m도 안 되는 이 골목들엔 빈집들이 많았다.
자물쇠로 잠겨 있는 대문의 틈 사이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던 취재진을 향해 주민인 박화연(75‧가명) 씨가 "빈집인데요"라고 말했다. 박 씨는 이곳은 도시가스도 들어오지 않아 약 10년 전부터 주민들이 떠났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몇십 년 전에 지어진 주택들로 개선도 없었다. 어설픈 집들 투성이다. 돈 없는 사람들만 남았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주민들은 이미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가고 없다"고 말했다.
몇 안 남은 주민들은 이 골목이 과거엔 불량청소년들의 집결지였다고 입을 모았다. 초·중·고 학생들이 많아 어두운 밤이 되면 음지인 골목으로 들어와 담배를 피우고, '삥뜯기'와 같은 악행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40년 동안 거주한 김기명(72‧가명) 씨는 "빈집처럼 창고 같은 곳에서 여학생과 남학생들끼리 담배는 기본이었고, 온갖 잘못들을 일삼았다. 쓴소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되레 학생들로부터 욕을 먹으면 서러울까봐 입을 떼지 않았다"며 "요즘에도 담배를 피우는 여고생들은 한번씩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도 이곳은 밤만 되면 섬뜩한 분위기에 성인들도 좀처럼 향하지 않는다. 인근 아파트에서 20년째 거주하는 김정미(20대‧가명) 씨는 "빈집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고, 밤이 되면 무서워서 잘 다니지 않는다. 인근에 학교들이 많은데 정문이 빈집촌과 반대 방향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곳 일대는 빈집촌이 형성되면서 학생들의 안전을 더욱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주하는 사람들이 없어 음지로 전락하는 만큼 언제든지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구조다. 이날 옥산초에 자녀를 데리러 온 김순희(43‧가명) 씨는 "학교 인근 골목들에 사람이 없어 어두침침한 곳이라고 느꼈다. 아이들이 다니기에 적절하지 않은 곳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옥산초교 아동안전지킴이 정순길(66‧가명) 씨는 "초등학생들이 하교하는 오후 1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이곳 일대를 순찰한다. 특히 골목이 곳곳에 있는 만큼 구석구석에 들어가고 있다"며 "아이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지만 혹시 못된 사람들이 위협할까봐 들여다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취재진이 만난 빈집 유형과 문제점
빈집이 주변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깨진 유리창 이론'이 대표적이다. 작은 무질서가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장기간 방치된 빈집은 무단 쓰레기 방치, 유해 동식물 서식으로 주변 환경을 망가뜨린다.
빈집은 건물 붕괴로 주변 이웃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대로 방치해두면 주변 지역이 황폐화돼 사전 예방과 사후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범죄 증가, 집값 하락 같은 사회적 문제도 일으킨다.
매일신문 취재진은 지난 2주 동안 대구 도심에 있는 빈집 '클러스터' 14곳을 방문해 실태를 파악했다. 초·중·고교와 도시철도 역사와 가깝고 달구벌대로 등 대로변과 인접한 곳을 위주로 선정해 입지가 좋은 곳임에도 빈집이 모여있는 원인 파악에 주력했다.
빈집발생유형은 과거 빈집 연구 등을 참고해 ▷고령자, 저소득층, 노후·불량건축물 밀집 등 주변환경 열악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 지연 ▷신시가지 개발로 인한 구도심 공동화 ▷산업시설 폐쇄에 따른 지역 경제 쇠퇴 등 크게 4가지로 구분했다.
주민들의 증언과 현장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주변 환경 열악 유형으로 꼽힌 곳이 6곳(42.85%)으로 가장 많았다. 북구 침산동과 남구 대명동 등이 대표적이다. 취재진이 만난 빈집 거주자는 70~80대 노인이 대부분이었고, 건축 연한은 1916년부터 1985년까지의 분포를 보였다. 준공 후 40년쯤 지난 1980년대 지어진 건물이 가장 흔하게 목격되는 빈집군이었다.
나머지는 서구 내당동 등 정비사업 지연 5곳(35.71%), 중구 남산동 등 구도심 공동화 3곳(21.42%)으로 분류했다. 지역 경제 쇠퇴 유형으로 꼽힌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주변환경 열악, 정비사업 지연, 구도심 공동화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빈집과 함께 살고 있는 주민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도 비슷했다. 비행청소년 등 우범지대화, 쓰레기 투기, 노숙자 거주, 벌레 등 해충, 도둑 등 범죄 우려, 악취, 붕괴 우려 등이다. 바라는 점은 빈집 정비 혹은 철거, 정비사업 활성화가 압도적이었다.
서정인 영남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는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착공 전까지 주거권과 생활권이 전혀 보장돼 있지 않다. 붕괴부터 우범화 등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며 "빈집들에 대한 각종 개선 대책들이 적용되고 있지만, 주변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만족할 만큼의 정비는 이뤄지고 있지 않다. 지자체 또는 국가가 도시 속의 빈집에 대해 적극 행정을 펼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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