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리저리 궁상맞게 변명거리만 주절댔다. 아내의 눈동자가 돌아가는 걸 오랜만에 보았다. 분노가 정점을 넘었다는 걸 알아챘다. 공포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변명으로 풀릴 일이 아니기에, 멀뚱멀뚱하니 주인의 눈치를 알아보려는 개꼴이 되었다. 핥고 빨다가 눈에 거슬리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버리는 멍멍이 말이다.
나는 아내에게 사육되고 있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친구들과 한잔하면서도 "아마도 나는 마누라한테 사육당하는 것 같다."라고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했다. 마흔 초반이었던가. 미친 듯 나를 풀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퇴근 중에 발작적으로 포항 밤바다를 찾았다가 새벽녘에 돌아와서는 "아내 앞에서 나를 그만 사육하고 이젠 풀어달라."고 외쳤다. 회사도 출근하지 않고 곧바로 집을 나와 버렸다. 가출이었다.
모텔에 들어앉아 아내와의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보았다. 삶을 상실한 나에게 빛과 같이 나타나 손을 잡아 준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었기에 한눈에 천생배필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사귄 지 얼마도 되지 않아 나를 송두리째 넘겨줄지는 미처 몰랐다.
문어발처럼 늘여져 있던 이성 친구들과 하나하나 단절했다. 술집 출입도 끝냈다. 열심히 교회에만 다녔다. 그녀가 좋다 하면 무조건 좋다 했고, 싫다 하면 무조건 싫다 했다.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온몸의 촉수를 고추 세웠다. 월급봉투에 적혀진 금액조차도 알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책정된 기밀비면 한 달 잡비로는 모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오래가면 변질된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남자, 그게 나였다. 언제부터인가. '길들여져 가는 나'를, '길러져 가는 나'를 발견했다. 처음엔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사나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철부지처럼 고의로 비뚤어지자고 마음먹었다. 밖으로 나돌았다. 밤이면 포커판으로, 댄스홀로, 당구장으로 쏘다녔다. 아내에 대한 부담감은 늘어났지만, 일부러 미운 짓만 골라 하였다.
그랬더니, 아내도 나보란 듯 탁구장으로, 볼링장으로 나돌았다. 아내에 대한 우려감이 생겼다. 한마디 했더니 "당신은?"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이렇듯 나는 건건이 아내에게 밀렸다. 성격의 차이, 느긋함과 초조함의 차이였다. 집에 들어서면 내가 할 일은 없어졌다. 집안일에는 세세히 알려 하지 말라고 나에게 경고했다. 뭐를 하든 월급이나 꼬박꼬박 집에 가져다주는 것으로 네 할 일은 끝이란 뜻이 아닌가.
사랑하면 끝이 이렇게 변질되나 생각하니, 후회가 엄습했다. 사육당하는 걸 사랑을 받는 거라고 지레짐작한 바보가 내린 결론은 '어떻게 복수하나'였다. '울며불며 빌 때까지 집으로 들어가지 말자. 내 그늘이 얼마나 깊었는지 한 번 느껴봐라.' 아내는 아이를 시켜 속옷이나 와이셔츠 등을 보내왔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무척이나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이미 몸에 젖을 대로 젖고, 밸 대로 배인 생활이 아니었던가, 그 속에서 부대낌이 그리웠다. 그러나 내 자존감은 어쩌란 말인가. 대학 시절 하루를 가출했다가 친구에게 붙들려 귀가한 일 말고는 처음이었다. 그때는 단순하고 의미 없는 해프닝이었지만, 이번은 평생에 두 번째인 가출이고 반항인데, 또한 분명한 요인이 있지를 않은가. 아무런 소득 없이 슬그머니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결국, 어머니의 칠순을 핑계로 원대 복귀한 셈이 됐다. 한동안은 아내도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서로서로 눈치로만 주고받고는 숨죽여 지냈다. 백기는 내가 먼저 들었다. '궁한 놈이 샘 파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란 마음으로 나의 치졸한 행위를 자아비판했다.
어떻든 나는 답을 얻어야 했다. 지금, 그 오래전 생각을 다시 뜯어본다. 퍼즐 맞추듯 한 조각 또 한 조각 자리에 갖다 붙여본다.
칠십을 살아왔다. 사육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엿하게 반려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삶만 해도 백년해로가 아닌가. 그 삶 중에 사랑이 없었던가. 부부로서 서로에 대한 탐함이 없었겠는가. 행간마다 사랑과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이 있다. 가족은, 더군다나 부부간은 그렇게 익어가는 게다.
사육과 애완과 반려는 한 발씩 물러서서 바라보면 모두 사랑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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