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집 사랑채 앞에 아름드리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나무는 품이 넓어 우리 가족에게 오뉴월 뙤약볕을 피하게 해주는 든든한 가림막이 되었다. 가을볕에 감이 익어 갈 때면 형제들은 빨리 홍시를 달라고 조르듯 수시로 감나무를 올려다보곤 했다. 자랄 때 즐겨 먹었던 홍시 맛 때문에 지금도 해마다 철이 되면 감을 사 먹는다.
올해도 대봉감 한 상자를 들여 놓으니 마음이 넉넉해졌다. 감은 열흘쯤 지나 몇 개씩 주황색에서 빨강색으로 변하며 육질이 말랑말랑해져 달콤한 홍시가 되었다. 얇은 겉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는 순간 찰진 속살이 혀에 감겼다. 맛있는 홍시이지만 먹을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가 자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에 전념하지 않고 바깥출입이 잦았다고 한다. 거기다 그저 마음만 좋아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증을 서주어서 그리 많지도 않았던 전답을 깡그리 날려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셨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가장으로서 떠맡아야했던 책임감이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인감을 내어 주며 살림을 책임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남은 가산은 식구들이 살고 있던 집 한 채 뿐이었는데, 졸지에 가장이 된 아버지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산간벽촌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노동뿐이었다. 농사철에는 품삯을 벌기위해 남의 집 일을 하였고, 농한기 때는 깊은 산중으로 나무를 하러 다녀야했다. 옹골지게 해온 그 나무를 지고 높은 재를 두 개나 넘어 이십 리를 가서야 팔 수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나뭇짐의 무게가 버거웠지만 감내해야만 했다. 아침나절에 나서서 점심끼니는 거른 채 해거름 녘에 돌아오는 일이 예삿일이었다. 그러던 언 날, 아버지는 탈진해서 쓰러지고 말았다.
"얘야, 정신 차리거라. 이것 좀 먹어 보거라." 애끓는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할머니가 이웃에서 구해온 홍시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천천히 먹으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게 눈 감추듯 홍시를 먹고 기운을 차렸던 아버지는 그 맛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하시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약주를 드신 날이면 힘들었던 과거 얘기를 하시며, 사랑채 앞 감나무는 그 무렵에 심었다고 일러주었다.
괴로움을 감내하며 노력한 보람으로 아버지의 살림이 조금씩 불어났다. 자식도 구남매나 두었다. 식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집도 손수 크게 지었다.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붙박이로 살면서 자식들을 키워냈다.
구남매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감나무도 거목으로 자랐다. 어린 묘목으로 심겨져 한파와 태풍을 견뎌내며 성장한 나무가 아버지의 삶에 동반자이고 마음의 버팀목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해마다 감이 열렸고, 가을 햇볕에 영글어진 감을 곶감으로 만들어 팔기도 하고, 나머지는 곳간에 두고 설날까지 식구들 먹을거리가 되었다. 감나무는 열매를 내어 주고, 찬바람이 불면 잎이 떨어져 땔감이 되었다.
그 감나무는 아버지와 우리 가족에게 삶의 교훈을 일러주는 징표와 같았다. 계절의 어떤 혹독한 시련도 견뎌내고 꿋꿋한 자세로 서서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그 베풂의 품이 너무나 컸다. 우리에게 위안이었고, 힘든 계절에 새로운 계절을 기다리는 희망이었다. 그 감나무는 바로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넉넉한 품은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자랄 때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새겨듣지 않았다. 돌너덜길을 넘나들며 흘렸을 짜디짠 비지땀의 양을 짐작해 보지도 않고 그냥 아버지의 삶이려니 했다. 그 노고 덕분 대가족이었지만 태산보다 높다는 보릿고개도 배곯지 않고 넘을 수 있었는데도 감사함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힘든 세월을 겪어온 아버지는 생활이 힘든 이웃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마을을 지나다니던 도붓장사들은 자주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사랑채에는 촌수를 헤아리기 힘든 먼 친척 아저씨뻘이나 할아버지가 한 해의 겨울을 머물다 가기도 했다. 그러했던 아버지의 삶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이고, 어떤 어려움에도 대차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음을 우매한 나는 지금에야 깨닫는다.
뜻하지 않게 어린나이에 가장이 되었지만 단단한 배포로 살아냈던 큰 산 같은 아버지였다. 그 그늘에서 자라난 자식들은 성인이 되고 혼인을 하며 하나 둘 곁을 떠났다. 주렁주렁 열렸던 형제들이 떠나고 막내가 부모와 같이 살겠노라 머물렀다. 감나무 우듬지에 까치밥처럼 남았던 동생도 결국에는 떠났다. 대학을 졸업했으니 도회지에 나가서 살길을 찾으라는 부모님의 성화를 이기지 못했다. 다 떠나보내고 아버지 곁은 휑뎅그렁했다. 다 내어주고 빈 가지로 남은 겨울 감나무 같았다.
설에 찾아올 아이들에게 맛보이려 때깔 좋은 홍시 몇 개를 냉동실에 넣으면서, 명절이나 행사가 있을 때 찾아들던 자식들을 기다리던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 본다. 감나무 아래 서서, 동구 밖 모퉁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식바라기를 하던, 앙상한 가지로만 남았던 겨울 감나무 아버지! 그 아버지가 오늘 한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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