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2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나는 김치전도사였다' - 최기순

최기순
최기순

내가 탄 비행기가 마침내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맑은 날씨였는데, 이곳은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너무나 떨려서 어디가 어딘지 몰라 입국장에서 한참을 헤맸습니다. 짐 찾는 곳도 어딘지 몰랐습니다. 일본말을 할 수 없으니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하고 일본어로 적힌 꼬리표(태그)를 공항직원에게 보여주니 그제야 그들이 내 짐을 찾아주었습니다. 공항 대합실에서는 야애가시 선생님이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산을 미리 챙겨 가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먼저 우에노 공원으로 갔습니다. 벚꽃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답게 벚꽃이 만발했지만, 한국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에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선생님은 나를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선생님은 장어덮밥을 시켜주시면서 영양이 많아 몸에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된장국 한 사발과 오싱꼬라는 반찬이 나왔는데, 한 젓가락 집으면 금방 없어져 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성의를 봐서 밥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댁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와 위로 두 언니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세 자매가 모두 미혼이었습니다. 그 댁에서 일주일가량 머물면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나는 앞으로의 대책이 막연했습니다. 관광비자로 온 데다가 나이도 많아서 취직하기가 힘들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때 내가 다니던 염천교회의 이정신 권사님이 알려준 전화번호가 생각났습니다. 일본에 가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하라고 했습니다. 마침 동경(東京)에서 조금 떨어진 자바라는 곳에 권사님의 사촌동생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북이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그곳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사촌동생 분은 나에게 자기 집에서 머물면서 함께 일자리를 찾아보자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 댁에서 머문 지 일주일가량 되던 날 사촌동생 분이 버스수리공장인데, 할 수 있겠냐고 하더군요. 나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공장에서 청소도 하고 버스에 도색작업을 할 때 다른 곳에 페인트가 묻지 않도록 테이프를 붙이는 단순작업이었습니다. 공장주인이 사촌동생 분과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재일교포인 그분은 한국말도 좀 해서 대화가 되었습니다.

사촌동생 댁에서 10여 일을 머물고 있는데, 어느 날 그 근처에 혼자 사는 일본인 여자가 내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자기 집에 와서 묶으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가 한국음식을 좋아하는데, 특히 김치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김치를 담가주었고, 그 분은 너무 맛있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나중에는 그 분의 언니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분들과 교제를 하면서 일본말을 조금씩 배웠습니다.

토요일에 공장에 가니 여직원이 "아시다와 야쓰미되쓰네"라고 하더군요.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휴일(休日)이라고 한자를 써서 내게 보여주더군요.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후부터 그들은 한자를 써보면서 나와 소통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일본말을 배우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일본에서 돈을 벌어 한국에 가려면 일본어를 빨리 배워야한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1개월, 2개월, 3개월이 지나갔습니다. 나는 그 동안 일본말도 많이 배우고, 일본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한국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자를 받으러 대사관에 갔습니다. 담당직원이 "일본에서 방금 오셨는데 왜 또 가시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일본에 온천(溫泉)이 좋다고 하는데, 지난번에는 일정이 바빠서 못 갔는데, 이번에는 꼭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직원은 "온천에 가셨다가 꼭 돌아 오십시요"하고 말하며 비자를 발급해주었습니다. 일이 풀리느라고 그랬는지 일본으로 출국하기 며칠 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일본사람이 김치공장을 차리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내가 일본행을 택하게 된 것은 파출부를 하면서 알게 된 일본인 여교수의 권유 때문이었다. 야애가시(愛子)라는 이름의 그분은 당시 중앙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윤동주(尹東柱)를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두 서너 번씩 그분의 아파트에 가서 반찬이며 빨래 등을 해주었다. 미혼이었던 야애가시 선생은 그 학교에서 일본어 강좌도 맡고 있었다. 나는 그분을 꼭 '야애가시 선생'이라고 불렀고, 선생은 나를 "최상"이라고 불렀다.

야애가시 선생은 마침내 박사학위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내게 일본에서 취업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당시 엔화(yen貨)가 상당히 비쌀 때라 일본에서 같은 일을 한 달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적어도 석 달 치에 해당하는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야애가시 선생은 나름대로 우리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되었을 터이다.

첫째 아들은 결혼을 해서 분가를 했고, 여고를 졸업한 막내딸은 조그마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이때 둘째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파출부 등 허드렛일을 해서 번 돈은 자식들 뒷바라지로 다 들어갔다. 미국 유학물까지 먹고 온 남편이 영화사업을 한답시고 가정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던 때였다. 남편의 천호동 사무실이 문을 닫은 직후 나는 결심을 굳혔다.

나의 일본행 준비는 그러나 순탄치만은 않았다. 사실 나는 야애가시 선생의 제안을 받은 이후 마음만 들떴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랜 지인인 박여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본명이 박정희인데 남편이 영화사업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초창기 주요 파트너였다. 박여사는 숙명여대를 나온 엘리트였는데, 독신이었다. 서울에 인맥이 전혀 없었던 남편은 박여사의 도움으로 여러 사람을 알게 되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족이 서울에 와서 명보여관에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분 덕택이었다. 박여사는 우리가족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남편은 자신의 첫 작품인『미완성』의 머리말에 실명이름을 거론하면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한동안 박여사는 남편의 후원자이자 나의 조력자였고, 당시 어린 삼남매에게는 도우미 아줌마였다. 하지만 남편과 박여사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이유는 물론 돈 때문이었다. 박여사는 남편의 영어실력과 사업비전만을 믿고 자신의 것은 물론이고, 대학동창이며 친척들 돈을 끌어다가 남편의 사업밑천에 갔다 댔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지지부진해지고, 몇 차례의 실패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박여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눈앞에 있으면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빚에 쫓겨 잠적을 할라치면, 그때는 내가 타깃이 되었다.

박 여사는 시도 때도 우리 집을 들락거리면서 내게 돈을 갚아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는 둘째가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방황을 할 때였다. 박여사는 어느 덧 뚱뚱하고 심술궂은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거친 언설로 없는 남편을 욕하면서 나를 들들 볶았다. 어느 날 그런 일이 또 반복되자 둘째가 화가 나서 물바가지를 들어 박여사에게 끼얹어버렸다. 나는 둘째 아들을 크게 꾸짖었지만 내심으로는 통쾌했다.

둘째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MBC방송국에 입사하려다 안타깝게 좌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흘렀습니다. 둘째가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원서를 내고 싶은데 원서비용 3만원만 마련해줄 수 있겠느냐고 하더군요. 대학교 다닐 때부터 틈틈이 예술에 관한 공부를 했는데, 이번에 시험을 한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식들만큼은 반드시 공부를 시켜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만원이 적은 돈도 아니고, 당장 수중에 없어서 지인들로부터 빌릴 수밖에 없었지요.

둘째는 "엄마! 합격해도 가지는 않을 거지만, 내 실력을 한번 테스트해보고 싶어요."라고 하더군요. MBC에서 2차까지 합격하고 최종면접에서 떨어진 것이 못내 아쉽고 억울했나 봅니다. 아들이 시험을 치르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일을 나갔다가 저녁에 집에 돌이오니 어머니께서 "얘야! 어디서 전화가 왔는데, 시무가 뭐 합격을 했다고 어쩌고 하더구나."하시더군요.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고, 막막해졌습니다. 둘째가 돌아왔지만, 나는 합격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틀이 더 지나자 둘째가 궁금했는지, 직접 자기 할머니에게 어디서 전화연락이 온 것이 없었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내 사정도 잘 모르시고 눈치 없이"그제 학교에서 전화가 왔는데, 합격을 했다더구나."하고 털어놓았습니다. 둘째는 별로 기쁜 내색을 나타내지 않고 내 눈치를 보는 듯 했습니다. 그만큼 집안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등록금을 낼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마감날짜가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었지요. 나는 아들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인데, 어렵사리 합격까지 해놓고 등록금이 없어서 포기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나 자신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의도에 살고계시는 양숙희 권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10만원을 선뜻 빌려주셨습니다. 그분은 필요할 때 늘 도움을 주셨지요. 그래도 10만원이 부족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한때 파출부 일을 했던 한 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을 했고, 그분도 10만을 빌려주셨습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옛말이 생각났지만, 나는 내가 못 배운 것이 한(恨)이 되어 자식이 공부를 하겠다면, 말릴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남은 것은 여기 저기 빚뿐이었습니다.

어쨌든 우리 가족과 박 여사의 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 여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남편이 박여사에게 진 빚만큼은 갚아주고 싶었다. 나는 박 여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일본에 가서 돈을 벌어 우선적으로 빚을 갚겠으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리고 일본여행 준비를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의 간곡한 부탁에 박여사는 그러마고 했다. 나는 여권과 돈 20만원을 건네면서 일본행 편도 항공권을 끊어달라고 했다. 그것을 챙긴 박여사는 그 길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연락마저 끊어버렸다.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박 여사에게 돈까지 맡긴 것은 나의 진정성을 믿어달라는 표시였는데, 배신을 당한 것이었다. 이미 일본에 짐까지 부쳤는데, 막막했다. 여권을 새로 발급받고 비자도 다시 신청해야 했다. 구청에 여권 분실을 신고하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고, 당장 비행기 푯값 20만원을 구하는 것도 문제였다. 나는 급한 대로 전에 파출부 일을 해주었던 양권사님을 비롯한 지인들에게 또 돈을 빌렸다. 나는 그 돈으로 직접 항공권을 구하고 약속한 날짜에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나는 공항 로비에서 불안한 듯 자꾸 뒤를 돌아보셨다. 혹시라도 박여사가 공항까지 쫓아와서 티켓을 빼앗아 갈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탐승을 해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1988년 4월 7일 나는 일본 나리타공항에 첫발을 디뎠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본어를 하나도 몰랐다. 야에가시 선생이 워낙 한국말을 잘해서 일본어를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관광비자를 발급받았는데, 체류기간은 90일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난생 처음 외국여행이자 외국에서의 알바를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 나는 야애가시 선생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버스수리정비소에서 알바를 했다. 버스 외장에 도색(塗色)을 할 때 페인트가 잘 배이도록 사포질을 하는 단순노동이었다.

한 달 후 나는 일본인이 차린 조그만 김치공장에서 찬모(饌母)로 일을 하게 되었다. 니가타(新潟県)라고 하는 곳이었다. 마침 한국인 종업원도 있어 통역도 해주고 이국땅에서 의지도 되었다. 내가 담근 김치를 맛본 그곳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맛있다고 칭찬을 했다.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소싯적부터 김치 담그는 솜씨 하나는 끝내준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내 본격적으로 김치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식으로 김치 100포기를 담았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이 김치가 한국인들 입맛에는 맞았지만, 일본인들이 먹기에는 너무 매웠다. 그래서 애써 만든 김치들을 전량 땅속에 파묻어야만 했다. 나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 김치를 개발하게 되었는데, 배추김치, 깍두기, 오이김치 3종 세트가 그것이었다. 이 김치들이 먹히면서 포장지에 아예 내 사진과 본명인 '최기순(崔基順)'까지 달고 출시를 했던 것이다.

지역신문에 김치공장 얘기가 실리면서 화제가 되자 어느 날 일본 NHK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방송국 기자는 한국과 일본이 더욱 친교(親交)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특집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아직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바싹 긴장했지만, 그래도 기자의 질문에 서투른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대답을 했다.

"김치의 맛을 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소금으로 간을 잘 맞추어야 하지요. 그리고 둘째는 잘 숙성시켜야 합니다."대략 이런 내용으로 진행된 인터뷰를 마치자 기자는 내게 "혼또니 감빠이데스네!"라고 말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통역관이 "참 잘하셨다!"는 말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김치공장에 들어온 지 3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비자연장을 위해 사장과 함께 대사관에 갔다. 대사관 직원은 회사가 소규모 업체이기 때문에 비자발급이 힘들다고 했다. 나는 그간 배운 서툰 일본어로 떠듬떠듬 하소연을 했다. "저는 이 공장에서 저의 의무를 다 하고 싶습니다. 부탁합니다."

이 말을 들은 대사관 직원들은 서로 의논을 하더니 3개월 비자를 발급해주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니가타 김치공장에서 9개월을 일했다. 주일이면 한인교회에 나가 교포들과 친교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간의 시름과 외로움을 달랬다. 일본어를 잘 몰랐던 내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거리의 간판들 가운데 한자가 유독 많았다는 것이다. 지하철 표지판도 어김없이 한자로 되어있었다. 내가 소싯적에 스스로 깨우쳤던 한자 독해능력이 이국땅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본에서 가진 두 번째 직업은 도시락공장의 종업원이었다. 잘 나가는 김치공장을 그만둔 것은 결국 비자 때문이었다. 애초 관광비자로 일본에 갔던 터라 만료가 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귀국해서는 김, 고추장, 한과(漢菓) 등 당시 일본에서 귀한 것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다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지인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이처럼 일본출장이 잦다 보니 대사관에서 비자 체류기간을 대폭 줄이고 말았다. 15일 체류기간에 1회 연장을 해도 1달 정도였다. 비행기 푯값이 더 들 정도였다.

야애가시 선생은 보다 큰 회사를 물색했는데, 마침 천리(千里)라는 회사명의 도시락공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회사가 큰 회사니만큼 이력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머리도 좋고 일본어도 금방 습득하고 친화력도 있어서 그렇게 지레 짐작을 했던 모양이다. 나는 야애가시 선생에게 초등학교 중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난감해진 선생은 한참 고민하더니 이력서를 '가라'로 만들라고 제안을 했다.

나의 일본체류 목적은 돈을 벌어 자식들 공부시키고 남편이 지은 빚을 청산하는 것이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나온 온양중학교를 졸업했다는 거짓 이력서를 만들어 회사에 제출을 했다. 이력서와 김치공장 경력을 눈여겨 본 회사의 회장은 나를 전격 채용을 했고, 일본에서의 제2라운드가 시작된 것이다.

일 년 비자를 받으니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이제는 도시락공장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면 하나님께서도 길을 열어주시리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이제는 비자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이 공장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한국인도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일본인 직원들이 한국 사람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인이 일하기 싫어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나로 인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이지요.

회장님은 나에게 공장 안에 방도 따로 하나 마련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월급은 20만엔이었습니다. 이제는 좀 숨을 돌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한인 교회에 가서 한국인 교포들과 사귀면서 한국말로 마음껏 얘기하면서 그간의 고생을 달랬습니다. 일 년 비자라 일 년에 한 번씩은 서울에 다녀왔고, 또 일 년에 한 번씩은 동료들과 온천(溫泉)에 다녀오는 여유도 갖게 되었습니다.

천리(千里)에 들어간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일을 하면서 나는 매일같이 흰쌀밥에 맛있는 반찬을 먹고 지내는 나를 새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호의호식(好衣好食)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다들 풍족하지 못한 형편이어서 교회에서 숙식을 하면서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매일 먹는 맛난 도시락을 그들에게 가져다 먹일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 후에 전무님을 찾아가 사정을 했지요.

"전무님! 죄송합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도시락을 팔다가 남으면 전부 폐기를 하지요. 우리 교회에 유학생들이 몇 사람 있는데, 남는 도시락을 제가 그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습니다."

전무님은 무척 당황해하면서 남은 도시락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면 회사(會社)의 책임이라고 거절을 하셨습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전무님을 찾아가서 졸라댔습니다. 하루는 전무님이 나를 불렀습니다.

"남은 도시락을 가져가는 대신 그 음식을 먹고 병이 나면 절대 회사에서는 책임을 질 수 없으니 최상이 알아서 하세요."

나는 전무님의 허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나는 목사님께 전화를 드려 이 같은 사실을 전하고, 어떤 때는 내가 직접 도시락을 가져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목사님이 오셔서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매주 토요일 오후 교회에 도시락을 배달했습니다. 남은 도시락을 모아 배낭에 넣고 공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전철역으로 가서 다시 신주쿠까지 가야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이 났지만, 한 달 두 달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철역 계단을 어렵게 올라가면서"내가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해야 하지? 그렇잖아도 힘이 드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내 옆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더듬거리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장애인을 보면서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왜 힘들다고 짜증을 냈는지 반성을 했습니다. 이후로도 몇 번 그 장애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새삼 깨달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명색이 권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애통해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던 학생들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장성하여 각자의 길을 가고 있겠지요.

지금은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하고 고된 나날들을 보내고 나니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오늘날까지 잘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일본에 갈 때는 돈을 벌어 빚도 갚고 내 집도 마련하자는 일념뿐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는 뜻이 있어 나를 그곳까지 인도해주셨고, 또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것도 바로 그분의 뜻입니다.

천리(千里)라는 회사에 들어간 지 벌써 4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초가을이었습니다. 집에서 한 통화의 전화가 와서 받으니 딸내미였습니다. 일생(一生)을 사업한다고 방랑 생활(生活)을 하던 남편이 병들어 집에 와 있다가 세상을 떴지요. 오십 칠세 나이에 삼남매 아이들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한 불쌍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주일이었지요. 교회에 갔다가 내가 신세를 많이 진 일본인 야애가시 선생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있었지요. 그런데 딸내미가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막막했습니다. 선생이 그래도 한국에 갔다와야하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월요일 아침 출근하여 사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빨리 준비해 다녀오라고 하시더군요. 인사를 하고 하네다공항에 가는 전철에 올랐습니다. 한 시간 거리인데, 무척 길게 느껴졌습니다. 60세 환갑도 못 넘기고 가는 인생이 왜 그동안 가정을 등한시하고 정처 없는 방랑생활을 하다 가는가? 그것도 늙으신 노모를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네다공항에서 유나이티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큰조카가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동암에 있는 집에 가서 어머니를 뵙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이미 염천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이 와서 장례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큰아들이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살아서도 보기 싫었던 얼굴이었기에 외면을 하고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이튿날 용미리 공동묘지에서 장례식을 무사히 치렀습니다. 식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그동안 너무나 고생했던 기억과 그간 남모르게 당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닥쳐오면서 처음으로 마음껏 펑펑 울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무서워서 이 집에 살 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어머니께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십 수년 객지를 떠돌다 병들어 돌아온 큰아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피골(皮骨)이 상접하여 뼈에 가죽만 입힌 형상인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더욱 그러셨을 것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사를 결심했습니다. 마침 앞집에 2000만 원짜리 전세가 있어서 계약을 하고 식구들과 또 다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그날 저녁 나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살이가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편은 왜 그 좋은 영어실력을 가지고 실력발휘를 하지 못하고 한 평생을 남의 빚을 지고 숨어 다녀야 했을까요? 사실 남편이 가족과 함께 산 것은 애들이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한다면, 병들어 집에 온 두 달간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큰아들을 가까이서 바라봐야 했던 어머니는 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결심을 굳게 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내 집을 마련하자는 다짐이었지요.

나는 그야말로 열심히 일을 했다. 도시락을 만드는 회사인지라 새벽 5시부터 저녁 5시까지 쉴 새가 없었다. 비록 3개월 체류의 비자였지만,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고 한국에 왔다 갔다 하기를 여러 차례 하면서 나는 성실성과 요리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어느 날 회장이 나를 따로 불렀다. 내 일본식 호칭은 '최(崔)상'이었다. 회장은 서류 한 장을 내주면서 이것을 갖고 한국대사관에 가면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며칠 후 귀국을 한 나는 단골여행사를 찾아갔는데, 그 서류를 본 여직원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주머니! 도대체 어떤 높은 사람을 알기에 일본에서도 유명한 문부성(文部省) 도장을 받아가지고 오신 거예요?"여직원은 박수를 치며 나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당시 그 여행사에서 문부성 허가도장을 받아온 고객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단기비자로 일본을 뻔질나게 왕래했던 나는 1년짜리 취업비자를 발급받아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때 회사에 함께 있던 일본사람들은 한국인이 일을 게을리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와 일을 하던 한국인들이 성심과 성의를 갖고 일을 할 리 만무했고, 그러한 사정이 일본인들에게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게 되었을 터이다. 내가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탄복한 일본 직원들은 나를 통해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적어도 천리(千里) 사람들은 그랬다. 나는 천리에서 거의 10년간을 일했다.

내가 1988년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때 53세였다. 나는 김치공장을 시작으로 도시락공장을 거쳐 만년에는 한식당을 차렸다. 어느덧 67세가 된 나는 도시락공장을 퇴직하고 곧바로 한국행을 생각했다. 나는 천리(千里)에서 일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자식들 공부시키고 둘째 아들의 결혼까지 무사히 치렀으니 일본에 온 보람이 컸다. 이제 미련 없이 일본을 떠나려고 하는데, 어느 날 한 한국인 여인을 만나면서 계획에 변화가 생겼다. 50대 후반이었던 그 아줌마는 내 비자기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을 알고는 식당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망설이고 있는 내게 그 아줌마는 좋은 식당자리가 있다고 나를 부추겼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지인분들과 상의를 했다. 그분들은 내가 음식 솜씨가 좋으니 식당을 운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지인들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이내 식당을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계약금 20만엔에 월세 8만엔을 주기로 했다. 한식당으로 동대문(東大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주 메뉴를 감자탕과 족발로 하고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내 주변에는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온 교포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주 고객이었다. 한 1년 동안은 식당운영이 잘되었다. 한국인 손님들이 알음알음 찾아와주어 월세를 내고도 남는 게 있었다. 이 기간에 둘째 아들 내외가 3박4일 일정으로 일본여행을 하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 2년간 더 식당을 운영하고 귀국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내 주변사람들 가운데는 불법체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 당국은 불법 체류자들을 잡아들여 3개월간 감금했다가 본국으로 송환을 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잡힐까 두려워서 거리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황이 그렇게 되다보니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처음 나에게 식당운영을 제안했던 그 아줌마가 계약금에 해당하는 돈을 가로채 잠적을 하고 말았다. 한국으로 야반도주를 했던 것이다.

낙심천만한 나는 식당을 접고 다시 김치공장에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68세였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한국인 사장을 설득해 결국 신주쿠(新宿)에 있는 김치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김치를 전문으로 담그는 사람들이 몇몇 있어서 나는 다른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사장이 내게 보쌈김치를 만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직접 담가본 적이 없던 나는 한번 시도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배추의 파란 잎사귀를 절여서 깨끗하게 닦아 물기를 빼고 펼친 다음 그 안에 갓 담은 김치와 삶은 문어다리를 넣고 돌돌 말아서 칼로 썬다. 그 안에 잣이나 얇게 썬 생밤을 넣어서 씹히는 식감을 높인다. 고급 포장지로 정성껏 싼 이 보쌈김치는 선물용으로 아주 제격이었다. 그렇게 이 보쌈김치는 그 공장의 인기품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말하자면 '나만의 레시피'였다.

나는 취업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활동이 자유로워서 귀국할 때까지 무사히 공장에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사정이 좋지 못했다. 내 주변 사람들이 속속 경찰에 연행되었고, 나는 그때마다 경찰서에 찾아가서 여권을 보여주고 통사정을 했다. "내가 책임을 지고 한국으로 돌려보내겠으니 제발 풀어주십시오. 가족들이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겠습니까?"

나의 유창한 일본어 구사와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경찰 책임자는 결국 나의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싸인을 하고 데리고 나온 사람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나는 일본에 간지 반년 만에 일본어를 깨우쳤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문학을 전공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정확히는 중퇴였다. 그래서 나는 공부에 한이 맺혔다. 나는 기억력도 좋고 나름대로 똑똑한 편에 속했는데, 아버지께서 공부는 남자들이 하는 것이라면서 남동생들만 상급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래서 나는 홀로 한문(漢文)을 깨우쳤다.

나는 동갑내기 막내 작은아버지와 함께 국민학교 일차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1부터 100까지 숫자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합격을 했지만, 작은아버지(숙부)는 떨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여자애가 무슨 공부냐 하면서 매일같이 야단이셨지요. 그래서 나는 숨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일본글을 배우면서 3학년까지 다녔는데 갑자기 해방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한글을 배워야했는데 집에서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골 동네의 한 사랑방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야학이 될 것입니다. 나는 공책과 연필을 들고 저녁마다 글을 배우러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사랑방에 오셔서 할아버지가 날 찾아오라고 난리법석을 떠셨다고 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할 수 없이 야학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독학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어머니를 도와서 동생들을 돌보고, 밥도 짓고 빨래도 했습니다. 밥을 할 때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 부뚜막 주변이 까맣게 그을리게 되는데, 나는 그을린 부분을 칠판삼아서 부지깽이로 글을 쓰는 연습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보고 불을 똑바로 때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6.25사변이 터졌습니다. 그 당시 우리 친척들이 많이 희생을 당했는데, 아버지 바로 아랫동생인 작은아버지(중부)께서 인민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결국 월북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식구들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인민군에 가게 되면 모든 식구들이 주변의 싸늘한 눈총을 받으면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나는 작은어머니와 사촌동생들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습니다. 작은집에 가보니 작은어머니가 아직 여물지도 않은 파란 벼를 가져다가 털고 있었습니다. 작은어머니는 나를 보자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굶고 있는 어린 삼남매를 좀 돌봐달라고 애원을 하다시피 했습니다. 나는 그날 사촌동생들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밥을 해 먹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을 알고 노발대발 하시면서 빨리 데려다주라고 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큰집) 식구들마저 다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쩔 수없이 사촌동생들을 다시 데려다주어야 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이튿날 다시 작은집에 찾아갔습니다. 집에 아무도 안 계셨습니다. 이웃집에 물어보니 아침 일찍 청년단 사람들이 와서 빨갱이 자식들이라고 다 체포해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 작은어머니를 비롯해서 삼남매가 모두 총살을 당했습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같은 동포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는 이런 비참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몸져누우셨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울음 속에 몇날 며칠을 보내야 했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도 역시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모진 매를 맞아 골병이 들어 술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두 번째로 다녔던 일본교회에서 단체로 나가사키(長崎) 여행을 간다고 했습니다. 동경 우에노에 위치한 교회입니다. 2박3일 일정에 여행경비는 12만엔이었지요. 교인과 일반인 합해 25명 정원이었습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니 120만원인데, 너무나도 큰돈이어서 목사님께 갈 수 없다고 사양을 했습니다. 미야기 목사님은"나가사키는 전쟁시절에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되었고, 지금도 그 상처가 남아있는 역사적인 곳"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함께 갈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특히 종교인들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도 했지요. 나는 꼭 가보고 싶지만, 12만엔의 회비를 내기에는 무리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다음 주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이 나를 부르더니"최권사님도 함께 가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시더군요. 나의 딱한 처지를 들은 다른 일본교회에 다니는 장로님께서 내 여행경비를 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평소 남을 잘 돕기로 소문이 난 분이셨습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평화(平和)의 도시, 나가사키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니 약 3시간가량이 걸렸습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하여 느낀 첫인상은 말 그대로 '평화(平和)의 도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성당(聖堂)이었습니다.

나가사키 시내에는 많은 성당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중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등이 구부러진 할머니가 몇 백 년은 된 것 같은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하는 찬송 곡이었습니다.

모두들 그 찬송가를 따라 불렀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이기도 합니다. 연주가 끝나고 그 할머니의 연세가 궁금하여 성당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90세라고 하더군요. 일본은 노인들의 장수(長壽) 나라라고 하더니 그 말을 실감하겠더군요. 그분은 허리가 너무 굽어서 간신히 걸어 다녔지요. 그럼에도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아 몇 번이고 박수를 쳤습니다.

성당 마당으로 나온 우리 일행은 사방이 온통 사람 모양의 돌비석들로 가득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머리가 잘려나간 비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나는 관리인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분에 따르면, 전쟁시절에 폭격을 맞아 머리가 잘리고 두 동강이 나고 파손이 되었는데, 성당을 복구하고 비석들을 다시 세웠다고 했습니다. 나가사키는 정말'평화(平和)의 도시'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는 유달리 비둘기들이 많이 날아다녔습니다. 다른 도시에는 까마귀들이 많이 날아다녔지요. 일본생활을 하면서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이곳이 가장 감명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지금도 안부전화를 걸어오십니다.

내가 일본에 간지 어언 15년이 흘렀을 때였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일본사람들과 친분을 맺었지만, 그 가운데 특별한 친구가 있었다. 이시이 상이라고 불린 그 아줌마는 한국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 한국에 꼭 가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와는 다섯 살 터울이었다. 나는 이번 봄철에 휴가를 내서 같이 가자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전무에게 휴가를 신청했다. 전무님은 "두 사람이 빠지면 도시락공장은 어떻게 하냐?"고 농담조를 말하며 흔쾌히 승낙을 했다. 2003년 봄, 3박4일 일정이었다.

부천에서 막내딸이 혼자 살던 집은 방 두 칸짜리 조그만 빌라였다. 나는 처음에 이시이 상을 호텔로 안내하려고 했지만, '최(崔)상'집이 더 좋다고 하여 그냥 머물게 되었다.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이시이 상은 비좁은 그 집에서 이틀을 묵었다. 나는 이시이 상을 데리고 먼저 경복궁을 구경하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쇼핑도 했다. 이시이 상은 가는 곳마다 너무 좋아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두 사람은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컨셉은 우리나라 결혼식 때 치르는 폐백 장면이었다. 내가 신랑예복을 입고, 이시이 상이 신부의 색동저고리 차림을 했다.

사진이 무척 잘 나왔다. 이시이 상은 일생(一生)의 기념이라고 하면서 그 사진을 회사의 전 직원들에게 자랑을 하겠다고 했다. 휴가일정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나는 전무님에게 감사인사를 했고, 그분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열심히 일을 했고, 그렇게 또 몇 달이 흘렀다. 그런데 이시이 상이 몸이 안 좋아 병가(病暇)를 내고 나고야에 있는 집으로 떠났다.

나를 비롯한 직원들은 이시이 상이 하루속히 완쾌되어 회사에 다시 나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전무가 사내방송으로 "이시이 상이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알려왔다. 이시이 상의 아들이 연락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전무님이 다음날 함께 문상을 가자고 권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직원들과 함께 나고야의 상갓집을 방문했다. 일본에서의 조문은 처음이었다. 시신은 일본식으로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고 했다.

나는 다시 한번 삶의 허망함을 느꼈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함께 한국을 방문해서 경복궁도 가고 남대문시장도 갔었는데, 그 모든 게 마치 일장춘몽처럼 여겨졌다. 나는 쇼핑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으며 좋아했던 이시이 상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에서 얻은 소중한 친구와의 추억은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나는 2007년 영구적으로 귀국을 했다. 일본에서 보낸 19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청산유수(靑山流水) 같았다.

나는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평택에 단독주택을 마련하여 막내딸과 함께 살고 있어서 생활비가 따로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평생 몸을 움직이고 활동하며 살았기에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그렇게 1년가량을 집에서 허송세월했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일본사람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루는 일본인 지인들과 함께 커피숍에 갔는데,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커피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나도 정년을 훨씬 넘기고도 도시락공장 일을 했으니까.

나는 평택시청을 찾아갔다. 일본어통역 서비스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시청직원은 나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컴퓨터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컴맹이었던 나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시청문을 나서면서 참담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고국(故國)에 돌아온 것이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귀국 2년 째 되던 해인 2009년 정부에서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준다고 해서 나는 이번에는 읍사무소를 찾아갔다. 읍사무소의 직원은 내게"농촌(農村)일손 돕기라는 프로가 있는데 괜찮으시겠냐?"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일본에서의 그 고된 취업생활도 이겨냈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맡아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 배정된 일은 평택 인근에 있는 포도밭 농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5일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포도밭에서 가지치기도 하고, 포도가 익으면 수확하는 일이었다. 포도는 수확하는 대로 곧바로 기계로 찌고 갈아서 포도즙으로 재탄생했다. 한 달 월급은 70만원이었다. 여름 땡볕에 무척 고된 일이었지만 나는 힘들어 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출퇴근은 자전거를 이용했는데, 이 역시 일본에서 배운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마트에 갈 때면 자전거를 이용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일본생활 20여 년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보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남에게 빚을 지고 살 때는 정말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는데, 일본 땅에 와서 열심히 일하니까 길이 열렸습니다. 처음 이곳에 와서 고생도 많았지만, 마음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고, 주위 분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내가 이 세상을 뜰 때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 일본 메그미(은혜)교회의 미야기 목사님과 사또로 사모님은 언제나 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한국에 온 지 어언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내가 그곳 직장에서 만났던 모든 분들이 생각납니다. 보고 싶은 얼굴들입니다. 목사님과는 가끔 전화로 안부를 나누기도 하는데, 일본에 한 번 다녀가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요즘 들어 내가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조만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꼭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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