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2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나는야 영원한 문학청년' - 한겸택

한겸택
한겸택

분신의 유혹을 뿌리치다

1995년 5월, 혹시나 했던 해고무효소송 항소심이 역시나로 끝난 날이었다. 법원 청사를 나온 나는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거대한 석조건물을 향해 원 없이 감자를 먹였다. 그리고는 실성한 듯 히죽거리며 법원경내를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몇 발짝을 걸었을까,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온 노무관리실 직원이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악수를 청했다. 회사 측에 승전보를 전한 듯 승자의 여유와 오만이 적당히 흘러넘치는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최종심인 상고심이 남아있지만 대법원은 법리만 판단하는 법률심이니 재판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16년 청춘을 바쳐 일한 직장에서 퇴직금도 절반만 받고 쫓겨났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동자에게 단 한 마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재판 분위기로 보아 그랬다. 고향친구처럼 대하는 회사 측 변호사와는 달리 나는 입도 뻥긋 못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엉겁결에 손을 잡힌 채 그의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는 또박또박 일렀다.

"생산본부장에게 가서 분명히 전해. 이제부턴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라고. 회사 간부들, 고문변호사와 고향과 학교 선후배에 사돈에 팔촌으로 얽히고설킨 판사들의 심판에선 내가졌지만 진실과 정의와 양심만으로 판단하는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에선 내가 승리할 것이라고. 하늘의 심판인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이 진정한 심판이고 최후의 심판이라고…,"

경악의 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무과 직원을 뒤로한 채 히죽거리며 법원경내를 빠져나왔다.

주 46시간 근로제임에도 48시간 근로를 해 받던 주 2시간의 연장근로시간을 노사대표가 단둘이 만나 1시간으로 줄인 게 정당하다고? 그래 회사를 상대로 임금청구소송을 제기한 노동자를 노조명예훼손과 반조직 혐의로 노동조합에서 제명하고, 노사가 야합해 30일 무급정직을 때린 게 정당하다고?

2년 전 내가 민주후보로 출마한 노조위원장과 대의원 선거 때 후보자 납치와 공안기관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흑색선전물을 10여 가지나 만들어 3개 공장과 3천 조합원의 집으로 우송해 한겨레신문에 투고한 게 회사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30일 정직을 때린 게 정당한 징계라고? 그리고 일주일후 내가 근무했던 안양공장 공무과 자동정비반에 노조위원장의 선거참모를 신규 채용한 게 정당하다고?

그리고는 30일 정직만료 후 출근하자 안양공장엔 자리가 없다며 제품창고인 경기도 파주의 제품창고로 인사명령 낸 게 정당하다고? 노조조합원이 단 한명도 없고, 내가 사는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편도로 3시간에 걸쳐 버스와 전철을 5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업무 또한 입사 이래 16년간 해온 라면과 스낵포장기 정비업무와는 전혀 다른 전기실과 보일러실, 냉동실, 영선반(목공실), 폐수처리장 등의 일을 하라는 게 정당한 인사라고? 안양공장 원동과의 5개 부서에서 50여명이 하고 있는 일을 혼자 하라는 게 정당한 인사라고?

파주의 북부배송센터로의 인사명령이 사실상의 해고로, 30일 정직에 이은 추가 징계이자 그동안의 노조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복이며, 7개월 앞으로 다가온 1983년 10월의 노조위원장 당선을 막기 위한 술수임을 들어 근무했던 안양공장으로 나와 한 달 간 시정을 요구해 해고한 게 정당하다고? 그게 장기무단결근이자 명령불복종이라고? 그렇게 해서 해고 전 무급정직과 인사명령 거부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한 달만으로 퇴직금을 정산해 2,600만원 퇴직금을 1,300만원만 지급한 게 정상적이라고? 에라이 씨발놈들아! 에라이 엿같은 자식들아….

실성한 듯 히죽거리는 건 지하철역을 향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설움이 복받쳐 소리 없이 섧게섧게 흐느끼기도 했다. 비철거리는 걸음 거리와 중언부언거리는 입, 눈물콧물이 범벅인 얼굴을 뭇시선들이 흘끔거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안 그래도 2년여 해고무효소송을 통해 연거푸 하품을 해대며 귀찮은 표정이 역력한 판사들을 보며 회의가 들었다. 정성스레 만들어간 준비서면을 이렇게 긴 걸 언제 다 보냐며, 이 재판만 하고 딴 재판은 하지 말란 얘기냐며 힐난을 하기가 일쑤였다. 판사들이 재판자료를 제대로 보는 줄 아냐며 이죽거렸던 인권변호사 사무실의 노동상담실장 말이 실감됐던 것이다. 사건마다 한보따리씩 되는 자료들을 꼼꼼히 보다보면 머리통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선지 회사 측 변호인은 새빨간 거짓말을 일삼았다. 내가 어이가 없어 반론을 제기하면 판사는 자기가 물으면 답하라며 호통을 치기가 일쑤였다. 어쩌다 답변기회를 얻어 자초지종을 말하면 간단히 요점만 말하라며 퉁바리를 줬다. 자유, 평등, 정의니, '디케의 저울'이니 하는 고상한 말들로 포장된 재판이 판사 속여먹기 시합이자 짜고 치는 고스톱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있고,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니 어이가 없었다. 더 이상 합법적인 방법이 없다는 현실에 가슴이 답답했다. 칠흑 같은 동굴 속에 갇힌 듯 암담하기도 했다.

일순 22세의 나이에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절규하며 죽어간 전태일 열사가 떠올랐다. 비로소 분신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뿐인 몸을 바쳐 투쟁하는 방법 외에 억울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그런 극단적인 방법이라야 관심을 갖고 보는 척이라도 하니 당연했다. N라면 회장의 눈이라도 깜빡하게 할 수 있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새 야식시간을 틈타 N라면 공장 담을 기어올랐다. 신나통과 함께 '노동자의 살인행위 부당해고 철회하라!', '노동자를 등쳐먹는 노사야합 각성하라!'는 유인물을 든 채. 어렵사리 담을 넘을 즈음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비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속절없이 목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내려왔다. 끌려나오면서도 '노동자의 살인행위 부당해고 철회하라!', '노동자를 등쳐먹는 노사야합 각성하라!'를 외쳤다.

그런가하면 용케 담을 넘어가 본관사무실 3층 화장실로 잠입하기도 했다. 근 9시간을 화장실에서 기다렸다 인사권자인 생산본부장이 출근하자 그를 끌어안은 채 신나통을 둘러쓰고 라이터 불을 댕겼다. 불길에 휩싸인 채 '노동자의 살인행위 부당해고 철회하라!', '노동자를 등쳐먹는 노사야합 각성하라!'를 울부짖었다.

그러자 일순 삼청교육대 출신 안양지역 조직폭력배이자 구사대인 한상복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한상복은 근무시간임에도 각 현장을 배회하며 빨갱이새끼 잘 뒈졌다며, 사노맹 조직원으로 구속되게 생겼으니까 뒈진 거라며 이죽거리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며칠 후 사태가 수습되자 앓던 이를 뺀 듯 회심의 미소를 짓고 다니는 회사 측 간부들도 어른거렸다. N라면 불법, 은폐, 조작의 유일무이한 증인으로 언제 터트릴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영영 시간 속으로 묻어버렸으니 유쾌, 통쾌, 상쾌라는 빛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 저였다. 적들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끝까지 보란 듯이 당당하게 사는 것이란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투쟁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도 없거니와 적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이적행위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있고,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그들의 술수를 인정하고 승복하는 셈이기도 했다.

죽을 용기로 끝까지 살아남아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래야 머지않아 저승에서 만날 '내 마음속의 영원한 N라면 민주열사 3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있을 터였다. 1978년과 1991년과 1992년 서울 신길동의 대신공장과 부산공장에서 까마득한 우물 속으로 뛰어들고, 5층 아파트에서 투신하고, 믹서기에 휘말려 들어가 처참하게 죽어간, 그래 40년이 지나도록 허공을 떠돌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원혼들이었다. 평소 바른 말을 한다는 이유로, 회사 측과 야합해 밀실야합을 일삼으며 노동자들을 등쳐먹는 어용노조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연장과 휴일근로에서 배제되고, 보름 가까이 사표를 강요받고, 남자들이 일하는 믹서기로 자리이동을 당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이었다. 환갑의 노모와 30세의 아내, 세 살과 백일 된 남매를 둔 32세의 가장과 친구들과 함께 팔짱을 낀 채 거리를 활보하며 연신 까르르거리며 청춘을 만끽할 19세와 23세의 아가씨들이었다.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을 위한 글쓰기

두어 달 후, 제과점 구석의 식탁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였다. 몇 잔의 반주로 얼근해지자 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앞으론 특별히 바쁜 일이 아니면 난 점심만 먹고 들어가야겠어. 컴퓨터를 사서 N라면의 불법, 은폐, 조작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야. 내 운명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진실이 영영 시간 속에 묻힐지도 모르니까…."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반색을 했고, 기술자 역시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욱!'하고 치미는 분노조절장애에 조마조마했던 탓인지 시원하다는 빛이었다. 손으로는 빵을 만들면서 마음은 N라면 현장을 서성거려 도너츠를 시커멓게 태우기가 일쑤니 당연했다. 발효실과 오븐 손잡이를 잡고 지키고 있으면서도 발효오버를 만들고 바게트를 숯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럴 때면 담벼락을 들이받아 머리통을 박살을 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새벽 5시에 나와 반죽을 치고 성형을 한 빵을 발효오버로 개떡으로 만들고, 발효까지 잘 시킨 빵을 검댕이로 만드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기름장갑을 낀 채 몽키와 스패너를 잡고 기계와 씨름을 해야 할 내가 앞치마를 찬 채 야채를 썰고 밀가루반죽과 씨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1급 블랙리스트인 나를 해고시킨 후 민주세력들을 힘들고 냄새가 심한 곳이나 꼴통어용세력들이 있는 곳으로 분산 배치해 눈물을 머금고 일을 하거나 참다못해 사표를 쓰고나가는 민주세력들이 어른거리기 때문이었다.

2년 전 해고의 올가미가 서서히 내 목을 향해 다가오자 아내가 제과학원을 다녀 자격증을 땄다. 그래 해고이후 광명시에서 기술자를 두고 제과점을 시작했다. 새벽잠이 없는 내가 새벽 5시에 나가 식빵과 바게트, 과자빵의 반죽과 발효를 시키면 아내와 기술자가 나와 성형을 했다. 그리고 나는 오후의 생과자와 케이크 등의 일을 거들다 들어와 쉰 후 밤 12시까지 가게를 지켰던 것이다.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을 위해서야. 그렇게 세상에 알려야 다시는 그런 후안무치한 짓을 못하고, 하더라도 쉽게 못할 테니까."

아내와 기술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낫다는 눈치였다. 빵이라는 게 하나하나 손으로, 또 서서해야 하고, 구색을 맞추다보니 4-50가지가 돼 셋이서 해도 바빴지만 그래도 그게 낫다는 빛이었다.

그렇게 해서 컴퓨터를 사 두 상자에 이르는 자료들을 참고삼아 노동자의 기록을 위한 글쓰기를 했다. 1977년 입사 때부터 1993년 해고까지의 애환들을 논픽션 형식으로 기록하는 거였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처럼 고시공부를 하듯 글쓰기에 매진했다. 그러다보니 울분과 스트레스가 한결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1997년 봄 일간신문에 '2회 법률문학상' 공모 광고가 실렸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지인 '시민과 변호사'에서 공모하는 장편소설로 상금이 2천만 원이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지라면 수백천 명의 변호사와 판사, 검사들이 주독자일 터였다. 2년여 해고무효소송을 하며 회사 측 변호사와 판사들의 노동자에 대한 무관심에 충격을 받았다. 회사 측의 새빨간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회사 측 변호사와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판사들에 절망했다.

수백천명의 법조인들이 하나같이 회지를 꼼꼼히 보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몇 십 명은 볼 터였다. 그렇게 몇 십 명이라도 관심을 갖고 본다면 그것 역시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의 의미가 될 터였다. 아니 낙선을 해 심사위원 몇 명만 본다 해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라도 쳐봐야 답답한 가슴이 뚫릴 것 같았다. 2,600만원 퇴직금을 1,300만원만 받고 쫓겨난 데 대한 울분을 그렇게라도 토로하고 싶기도 했다. 2,600만원 퇴직금을 예상해 제과점 개장준비를 했는데 절반밖에 안줘 적금, 보험 등을 해약하며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 모아 시작한 터였다. 인사권과 징계권이 노조민주화 운동의 방해와 보복뿐 아니라 16년 청춘을 바쳐 일한 퇴직금까지 착취하는데 악용된다는 사실에 분기탱천했다. 인간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소설이 아닌 논픽션임에도 부랴부랴 응모를 했다. 마감일도 한 달 남짓 남았고, 장편분량에 턱없이 모자랐지만 기를 쓰고 맞춰 보냈다.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다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설보다는 이런 사실이야기들이 더 의미가 있는 게 아니냐며, 일단 읽어나 보라며 보낸 거였다. 1977년 입사 때부터 1992년 징계위원회까지의 불법, 은폐, 조작들로 제목이 김광규 시인의 시제인 '아니다, 그렇지 않다'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그렇게 장난삼아 응모를 한 '아니다, 그렇지 않다.'가 가작으로 당선돼 10개월간 '시민과 변호사'에 연재를 했다. 상금도 당선작의 절반인 1,000만원을 받았다. N라면에서 착취당한 1,300만원 퇴직금 중 1,000만원을 서울지방번호사회에서 벌충한 셈이었다.

시간에 쫓겨 맞춤법도 오탈자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글임에도 선택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첫 번째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에서 승리하나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심사위원장인 유시춘 소설가와 민변출신인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단의 덕이었으리라.

1년 전 야당의원들을 영입해 여대야소를 만들어 노동악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김영삼 정권이 몰락의 길을 걸으며 1997년 아이엠에프를 불러들이던 시대적 분위기도 부조를 했을 터였다. 나는 콧등이 시큰한 채 유시춘 소설가의 심사평을 읽고 또 읽었다. 하루 종일 이것만 곱씹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엄밀히 말해 소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뽑게 된 이유는 우선 그 문체의 활달함과 능변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현장을 그리는 솜씨가 아무리 그 이해 당사자라 하더라도 이처럼 리얼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좀 더 전문적인 공부가 뒷받침되었더라면 역량 있는 작가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난의 시대를 증언하는 명문들을 두고 우리는 굳이 그 예술적 완성도를 문제 삼지 않거니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이나 '성고문사건 변론서', 한일합방 당시의 '시일야방성대곡',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등을 두고 뉘라 그 문학적 형식을 운위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현재 우리 사회 초미의 정치현안으로 떠오른 노동문제의 한 전형을 성실하고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엄동설한의 거리를 나서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그 핵심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정책입안자들이나 날치기 통과를 강행한 집권세력들이 한번쯤 열린 마음으로 읽어보았으면 한다.

콧등이 시큰하며 가슴이 먹먹했다. 동시에 날개를 단 기분이기도 했다. 가물거리며 꺼져가던 내 문학의 불씨에 기름을 부어준 격이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책을 보며,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살았으면 하는 게 젊은 시절의 꿈이었다. 그러나 만고의 진리인 불광불급(不狂不及)을 외면한 채 철저히 미치지를 못해 자포자기상태였다. 그런 영원한 문학청년의 꿈길이 45세의 나이에 모세의 기적처럼 '짠!' 하고 열렸으니 와이리 좋노였다.

그러나 N라면의 불법, 은폐, 조작들이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지에 연재되고, 이 연재물의 복사본이 현장에 나돌아도 N라면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사실적시 명예훼손법'에 쫄아 N라면을 동신라면으로 쓴 탓일 터였다. 좀 더 강한, 그리고 계속적인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을 요구하는 셈이었다.

그래 노사야합 임금착취에 대한 투쟁을 소설형식으로 썼던 '주 44시간을 위하여'를 아내에게 보여줬다. 토요일까지 근무했던 1989년 주 48시간 근로제임에도 주 46시간 근로를 해 받던 주 2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을 노사대표가 단 둘이 만나 1시간으로 줄인데 대한 투쟁기였다. 1989년 노조위원장선거에서 후보자 납치와 민주후보인 나를 반체제 반인륜적인 불순세력으로 매도하는 10여종의 흑색선전물들을 대응을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결선투표 2일전 3개 공장과 3천 조합원의 집으로 우송한 선거였다. 그렇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해 어용노조를 당선시킨 후 한 달 만에 노사 대표가 단둘이 만나 한 밀실야합이었다.

그러나 내 글을 본 아내는 묵묵부답이었다. 애매한 표정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반짝하고 말았지만 1986년 문예중앙 중편소설 신인문학상에 '암호풀기'가 당선됐으니 아내는 나에겐 훌륭한 멘토였다. 그래 글을 쓰면 필히 아내의 검수를 받았던 것이다.

"왜? 소설 같지가 않아?"

"이걸 소설로 쓴 거야?"

아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일순 발가벗겨진 듯 한 기분이었다. '욱!'하고 뭔가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자존심이 코푼 휴지처럼 무참히 짓밟힌 기분이기도 했다. 내 소설의 멘토인 조정래, 황석영, 박완서 등의 소설들을 다시 보고 쓴 건데, 쓰고 나서 읽어보니 그럭저럭 쓴 거라고 생각해 보여준 건데 소설로 썼냐니 어이가 없었다.

"왜? 소설이 아냐?"

아내는 매몰차게 고개만 가로저었다.

"난 당신이 쓴 '암호풀기'같은 관념적인 소설은 못써.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같은 소설밖에 못써.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설도 못써.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밖에 못써…."

잠시 뜸을 들이던 아내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있었던 이야기나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쓰는 건 소설이 아냐. 그건 신문기사고 대자보야."

"그럼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돼?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알려줘. 답답해. 너무나 답답해."

나는 가슴이라도 탕탕 칠 기세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얼굴을 들이민 채 다그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가 자리를 뜨며 절규했다.

"몰라, 모르겠어 나도. 그러니까 앞으로 더 이상 묻지 마. 너무 힘들어!"

아내는 넌더리가 난다는 투였다. 허구한 날 써들고 와 꼬치꼬치 캐물으니 지긋지긋하다는 얘기였다.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고 유세떨지 마! 까다롭기로 소문난 이청준 작가의 극찬을 받고 당선됐다고 유세부리지 마! 알았어?"

나는 이렇게 되지도 않는 말을 아내의 뒤통수를 향해 날렸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형편없이 구겨진

자존심을 달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걸 몇 년을 주무르다 2003년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한국소설' 신인상에 응모를 했다. 많은 문예지 중 '한국소설'이 내 수준

에 맞는 듯 했서였다. 뿐만 아니라 과연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지 여부

를 확인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예심을 통과하면 소설로 인정받고, 잘

쓴 소설은 아니라도 그럭저럭 쓴 소설이란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세한 심사평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낸 '주 44시간을 위하여'가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 오른 열일

곱 편에 들었고, 최종심에 오른 다섯 펀에 들었다. 시선이 한쪽으로 고착

되었고, 사건전개가 지루한 게 흠이라고 했다.

"대단하네! 최종심에 올랐다는 건 당선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내가 호들갑을 떠는 시늉을 했지만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힘든 숙제를 끝내고나니 더 어려운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시선이 한쪽으로 고착되었고, 사건전개가 지루하다는 말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문학적 열병에 시달리다 여성동아 장편공모 당선작가가 하는 소설 창작교실에 등록을 했다. 10여명이 6개월 동안 작가의 지도를 받으며 한편씩 소설을 완성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엔 창작과비평 신인문학상 출신 작가가 하는 소설 창작교실에도 등록을 했다. 두 곳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받은 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대단한데 형상화가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도움이 될 만한 소설들로 이청준의 '눈길', '축제', 현기영의 '순이 삼촌',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러시아현대소설전집' 등을 추천받았다. 뿐만 아니라 문학의 교과서인 이태준의 '문장 강화'. 6권짜리 '한국소설묘사사전'. '우리말갈래사전'. '비속어사전' 등도 구입했다.

이 책들을 한약을 먹듯 인내심을 갖고 보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즐겨봐 온 조정래, 황석영, 박완서의 소설과는 달라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박히진 않았지만 공자님의 말씀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를 만끽하는 기분은 가히 황홀경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욱!'하고 치밀던 울분과 스트레스가 명치에 걸려 목구멍을 타고 넘지 못하는 느낌 역시 신비한 체험이었다.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에서 승리하다

2007년 9월 어느 날 오후였다. 운전 중 전화벨이 울렸다.

"한겸택 선생님이시죠?"

"그런데요."

"다른 게 아니라 선생님이 이번 217차 민주화운동자로 인정이 돼서요. 궁금하실 것 같아 미리 알려드리는 거예요"

일순 멍한 기분이었다. 심장이 멎은 듯 숨이 막히기도 했다. 나는 가까스로 차를 갓길에 세웠다.

"예? 뭐라고요?"

"217차 민주화운동자로 인정이 됐다고요."

이제야 제정신이 든 느낌이었다.

"난 구속된 적도 없는데요?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없고요."

상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날렸다. 1989년 해고자들과 함께 신청을 하려했으나 감방을 다녀오지 않으면 힘들다며 포기해 나만 신청을 했던 터였다. 난 진실과 정의의 힘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요? 지금 전화주신 분은 누구신가요?"

"네, 저는 국무총리 직속기구인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의 심사위원인 김윤식(가명)입니다. 선생님은 꼭 민주화운동자로 인정이 돼야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방금 전 이렇게 인정이 돼 너무 기쁜 나머지 미리 연락을 드리게 됐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

나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만 연발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목이 메며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넋을 잃은 채 섧게섧게 흐느꼈다. 그렇게 1997년 '법률문학상'에 이은 두 번 째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의 승리를 만끽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고, 이기는 게 정의가 아니라 정의가 이긴다는 만고의 진리를 절감했던 것이다.

나는 며칠 후 집으로 날아온 민주화운동자 인증서를 보고 또 봤다. 회사 측과 야합해 노동자들을 등쳐먹는 어용노조의 민주화운동이 불법, 선동에다 불순분자 빨갱이 짓은커녕 대한민국의 민주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일이라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기분은 고약했다. 1993년 해고이후 2007년까지 14년 치 임금을 보존하는 성격의 생활지원금이 1,300만원이기 때문이었다. 해고 전 30일 무급정직 기간과 편도로 세 시간에 걸쳐 버스와 전철을 다섯 번이나 갈아타고 출퇴근을 해야 하고, 노조 조합원이 단 한명도 없는 곳으로 인사명령을 내려 한 달 간 출근을 거부하며 시정을 요구하다 받은 퇴직금이 절반인 1,300만원이었던 것이다.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하다 쫓아내고, 1,300만원 퇴직금을 착취한 게 N라면인데 엉뚱하게 국가가 사과를 하고 퇴직금까지 주니 그랬다.

그럼에도 N라면은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도, 복직권유도 거부했다. 변호사. 대학교수 등 수십 명의 각계 전문가들이 수년간 자료수집과 현장 확인 작업을 거쳐 한 정부기관의 결정을 거부하며 반민주, 반노동자 기업임을 과시했던 것이다. 1993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당의 신계륜의원이 안양지방노동사무소장에게 흑색선전물을 흔들어 보이며 배후세력을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음에도 개 무시하며 답변을 거부해 의제자백을 한 위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1989년과 1990년 선거 때도 그랬듯 1993년 노조위원장 선거 때도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2차 결선투표 2일전 3개 공장과 3천 조합원들의 집으로 10여종의 악의적인 흑색선전물들을 배포했던 것이다. 민주세력을 반사회적, 반인륜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내용의 흑색선전물들이었다.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의 강도가 너무 약하다는 얘기였다. 그래 글쓰기와는 별도로 인터넷 댓글투쟁을 병행했다. 회사 측이 어용노조와 야합해 임금의 백지위임을 주고받으며 선진노사기업이니 상생기업이니 하는 언론플레이를 하는 기사에 대한 댓글이었다. 회사 측의 대변인 노릇만 하는 어용노조의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하고, 이리저리 부서이동을 시키고, 죽음으로까지 내몬 반노동자, 반사회적 행태에 대해 사죄하라는 얘기였다. 1983년 원풍모망 근무사실을 이력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사 28일 만에 세 여성노동자들을 내쫓는 등 서울과 안양공장에서 노조민주화에 관심이 많다는 이유로 10여명이나 내쫓은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식품업체 최다 이물질 기업답게 잊을만하면 나오는 라면과 스낵의 이물질에 대해서도 진지한 사과나 반성, 재발방지책보다는 거짓해명과 제품으로 입막음하는 행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사 측과 야합해 노동자들을 등쳐먹는 어용노조의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소비자인 노동자들을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하고, 이리저리 부서이동을 시키고, 내쫓고, 죽음으로 내몬 회사가 일반 소비자들을 봉으로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기업은 기업주와 노동자, 소비자라는 세 바퀴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임을 명심할 것을 촉구했다. N라면이 회장님을 비롯한 몇몇 임원들의 자금과 능력만으로 커온 게 아니라 50여년에 걸친 정부의 저임금과 노동운동 통제정책 덕에 커온 것임을 잊지 말라는 거였다. 공장 설립부터 이후 운영까지 공공요금인 가로등보다 훨씬 싼 전기료 등 각종 세금혜택으로 커온 거라는 얘기였다. 노동자들이 목숨을 바쳐 일한 대가, N의 제품을 믿고 사준 소비자 덕분임을 명심하라는 얘기였다.

그러자 '너 1993년 해고자지?'하는 반박댓글이 달렸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뭔지 알기나 하고 까부냐며, 사이버명예훼손의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걸 모르냐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수가 있으니 명대로 살고 싶으면 조용히 있으라는 댓글도 있었다. 그래 섬뜩해 몇 년간 댓글투쟁을 포기하고 소설쓰기에 전념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거였다. '한국소설'의 최종심 심사평대로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거였다. 소설 창작학교 선생님 역시 오랜 습작 탓으로 문장이나 구성은 탄탄하고 인물들의 따뜻한 시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힘도 나무랄 데 없으나 형상화가 부족하다고 했다. 형상화가 있어야 읽고 나서도 여운이 남는데 그렇지가 못하다고 했다. 그러니 대화체를 줄이고 묘사체를 쓰도록 노력하라고, 1인칭 보다는 3인칭이나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써 보든가, 아니면 노동자보다는 사장이나 관리자 아니면 어용 조합원 시각에서 써보라고 했던 것이다.

아내 역시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 독자들이 호기심을 갖고 읽게 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고 했다. 소설은 주인공의 행동이 벌어지는 마당인데, 따라서 인물간의 갈등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건데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는 식의 글쓰기는, 남이야 공감을 하건 말건 내식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대자보나 다름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다. 섭섭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 시작한 게 마음공부였다. 남의 얘기하듯 덤덤하게 쓰려면 달리 도리가 없었다. 글은 마음의 거울이라더니 글만 쓰면 어느새 나타나 선동을 하는, 법과 상식과 정의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울분과 증오심부터 다스리는 게 급선무일 같아서였다. 또 20여년 가까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증오하다보니 조용필의 노래대로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였고,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버렸다, 이제는 그대를 내가 보낸다'였던 것이다. 그래 열심히 마음공부학교를 기웃거렸고, 사찰의 참선교육에도 참석했다. 국가기관의 민주화운동 인정조차 거부한 채 사과와 반성은커녕 회사의 명예훼손 타령만하며 반노동자, 반민주기업임을 고집한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는 측은지심이었다. 민주화운동 인정으로 이미 '정의의 심판, 역사의 심판'은 끝난 일이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는 식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공부한 게 도대체 문학이란, 소설이란 무엇인가였다. 근본적인 인식부터 잘못된 것 같아서였다. 그런 한편으론 수십 년간 소설의 교과서로 인정받는 작품들을 필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조금씩 숨통이 트이며 솔솔 재미가 일었다.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듯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던 주변이 여명이 트이듯 희끄무레 보이기도 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닌 듯 했다. 문은 두드리면 열리는 법이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만으로도 소원을 성취한 듯 뿌듯하고 행복했다. 흡사 하늘을 나는 듯,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공자님 말씀대로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였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였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은 이런 내게 천군만마와 같은 원군이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부모 형제가 다 살아 계심이요.

두 번째가 하늘을 우러러 봐도, 사람들을 살펴봐도 부끄럽지 않음이요.

세 번째가 제자를 가르치는 즐거움이라고 맹자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소인배들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요?

예나 작금이나 권력과 향락,

그리고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21세기는 평생학습 시대로 '열린 학교'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그래서 인생은 그 자체가 거대한 학교로

우리네 삶은 하루하루가 배우고 익힘의 연속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우선 이들은 절대로 주변 환경을 탓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꿈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또한 자기분야를 새롭게 개척하기 위해 성실한 구도인의 자세로

열정을 쏟는 것이 일반인과 다릅니다.

배운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겁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과 통찰력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성장 동력을 찾아내려면

즐거운 마음으로 배움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배우고 익히는 그 기쁨은

체험 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인간이란 죽는 그 순간까지 배우고 익힘으로 새롭게 깨어납니다.

막연히 글을 쓰는 일 정도로 알았던 문학이 작가의 체험을 통해 얻은 진실을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언어 예술이며, '인생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창조의 세계'라니 충격이었다. 문학의 요건 역시 작가의 사상, 감정의 요소가 독자에게 감명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전문적이거나 일부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쉬워야 하며, 독자에게 예술적, 미적 감동을 주는 것이어야 하고, 언어가 가지는 미적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있었던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있음직한 사건을 언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엔 나도 모르게 둘레둘레 쥐구멍을 찾았던 것이다.

소설의 목적은 가르침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웰스의 말 역시 충격이었다. 소설은 즐기면서 읽어야하고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적어도 그 독자에게는 무가치하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은 소설은, 지극히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소통의 광장이요,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인정을 나누는 사랑방이란 말엔 그저 유구무언이었다. 책을 읽고 난후에 예술에 대한 순수한 감동과 기쁨을 동시에 줄 수 없다면 그 책은 시간의 무게에 눌려서 사라질 것 이라는 말엔 화톳불을 뒤집어쓴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설을 사람 사는 이야기쯤으로 알고 너무 쉽게 쓰고 기고만장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던 것이다.

우리가 쓰려고 하는 것은 글짓기가 아니라 말 짓기이며, 따라서 글이 아니라 말이며, 우리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마음이요, 생각이요, 감정이라는 말엔 바보처럼 열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글은 문자로 그리는 그림이며, 문장의 가장 날카로운 힘을 줄 수 있는 게 묘사라는 말도,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그림 그리듯 그대로 그려낸다는 뜻이며, 글은 들려주고 알려주고 보여주는 세 가지를 한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경 실황을 보여주어 독자로 하여금 그 경지에 스스로 들고 분위기까지 스스로 맛보게 하기 위한 표현이 묘사이며, 아름답구나 하는 자기 심리를 독자에게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는 그 풍경이 아름다운 까닭을 즉 하늘, 구름, 산, 내, 나무, 돌 등 풍경의 재료를 풍경대로 조합해서 문장으로 표현해 주어야 독자도 비로소 공감한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신경이 척후병처럼 날쌔고 자세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말엔 거의 탄복의 지경이었다. 충만감에 눈물이 찔끔거리기도 했다.

'바람이 몹시 차다'는 설명이 아니라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저민다'는 감각을 표현하라는 얘기였다. 중학교 미술시간 때 동복을 새까맣게 색칠한 학생에게 선생님이 '그럼 눈 온 벌판을 그리라하면 백지를 그대로 내 놓겠구나' 했다는 말엔 내가 그 학생인양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했다. 눈이 희다거나 불이 뜨겁다거나 하는 개념이나 지식으로 글을 써선 안 된다, 흰 눈이 온 들판을 덮어 놓았으니 보기에 어떠하냐? 어떤 정서가 일어나느냐? 즉 눈 덮인 벌판에 대한 느낌이 어떠하냐? 그 느껴지는 바를 적는 것이란 말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아내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30여 년간 도저히 소설 같지도 않은 것들은 소설이라고 우기며 봐 달라고 조른 걸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미치는 시늉도 않고 미치기를 바란 내가 뻔뻔할 지경이었다. 아니 날강도였던 것이다.

나는야 영원한 문학청년

그러나 칠순이 다가오며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져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동안 몇몇 소설문학상에 응모를 했지만 예심조차 통과를 못하다보니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시의 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6개월 과정 시 창작교실에서 잘 쓴다는 얘기를 듣다보니 그쪽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신기루처럼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소설과 시에 더 이상 매달릴 수가 없었다.

그래 자신 있는 논픽션에 집중을 하기로 했다. 소설이나 시보다는 조건이 덜 까다롭고 있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듯 써 내려가면 되기 때문이다. 감동을 주는 글은 아니라도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그럭저럭 쓰는 글은 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공모전을 집중 공략하기로 했다. 그동안 30여 년간 끼적거린 게 수십 편이나 되고, N라면 불법, 은폐, 조작들을 그린 논픽션 역시 200자 원고지로 5,800매가 되니 이걸 주제별로 빼내 살을 붙이고 가공하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글을 쓰기 전 반드시 기승전결의 구성도를 꼼꼼히 짰다. 그러자 머릿속이 정리가 되며 글이 한결 맵시가 있었다. 그래선지 전보다는 쉽게 읽히며 글자들이 뇌리 속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대충 하던 퇴고 역시 쓰는 것 만큼이나 꼼꼼히 했다. 불때마다 오탈자와 잘못된 문장, 호흡에 걸리는 문장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이 작업 역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그렇게 해서 2019년 농민신문 '영농생활수기'에 '돈 봉투 돌리기'가 우수작으로, '한국인력진흥원'의 '분노관리 100만인 프로젝트'에 '분노하니 행복했노라!'가 채택돼 공저 '다이너마이트'에 게재됐다. 2020년엔 월간 전원생활의 '생활 속의 이야기'에 '우리 인생의 황금기'가 최우수작으로 당선됐고, 이걸 본 '전라도닷컴'의 원고청탁으로 '거름후원실'을 썼다. 뿐만 아니라 글Ego의 '책 쓰기 프로젝트'에 수필 '어떤 화해'를 공저 '우리가 걸었던 계절'에, 단편소설 '되치기 한판승'을 공저 '그리고 여기에 모였다'에 발표했다.

'돈 봉투 돌리기'는 2013년 일곱 가구가 조가비 같은 산골짜기에 오손도손 모여 사는 남녘의 산골마을로 귀촌 후 돌담을 사이로 이웃집과 이루어지는 선물경제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리고 '분노하니 행복했노라!'는 분노하니 회사 측과 동료들이 나를 다시보고 크게 보고, 인정하고 존중해 줘 나 역시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산 이야기다. 그러다보니 소극적, 부정적이던 성격이 적극적, 긍정적으로 바뀌어 마음과 몸까지 리모델링이 돼 인생의 후반기를 '나는 행복합니다!'를 흥얼대며 사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언성을 높이는 감정적인 분노가 아닌 히죽거리며 즐기는 차분한 분노였다.

'우리 인생의 황금기' 역시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해 대자연의 품에 안겨 대자연의 가르침대로 단순소박하게 사는 이야기를 쓴 것이고, '거름후원실'은 똥과 오줌은 밥이고, 배추고, 마늘이고, 상추임을 감안해 두 마리 진돗개를 비롯한 네 식구의 똥과 오줌을 퇴비로 만들어 쓰는 이야기다. 돈을 들여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보내고, 그곳에서도 돈을 들여 처리해 강으로 버리고,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다시 돈을 들여 처리하고, 그 물을 또 돈을 주고 사 먹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말자는 얘기였다.

그래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에게 깨끗하고 맛난 먹거리를 제공하는 대신 거름이라도 후원을 해달라는 의미로 '거름후원실'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자기가 먹은 음식물의 찌꺼기인 똥을 남의 것으로 착각하고 질색을 해 포기하고 '카페화장실로' 이름을 바꿀 생각이다. 프라스틱 통을 잘라 만든 똥통과 오줌통 위에 쪼그려 앉아 싸고, 그걸 큰 똥통과 오줌통에 붓고, 다음 사람을 위해 톱밥을 깔아놓는 것을 고역으로 생각하니 도리가 없었다. 허브 향과도 같은 톱밥 향을 즐기며 사방 벽에 붙어있는 창살문틀과 코앞에 걸린 대여섯 편의 시를 보며 똥을 싸니 그렇게 이름을 바꿔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화해'는 평생을 부모 형제를 원망하며 산 장형의 유골이 미국에서 비행기화물칸에 실려 온 후 뒤늦게 화해를 한 논픽션이고, '되치기 한판승'은 삼청교육대 출신 안양지역 조직폭력배를 구사대로 특채해 민주세력을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하게 하고 이를 즐겨온 N라면과 어용세력들의 악 선동을 선동으로 되치기한 얘기였다. 반대세력을 불령선인, 반동,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하고 죽음으로까지 내몬 일제, 공산독재의 수법이라며 되받아친 얘기였다. 안양과 부산, 안성공장의 1,300여명과 600여명의 노조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1990년 노조 위원장 선거 유세 때였다.

회사 측의 대변인 노릇만하는 어용노조의 민주화 운동이 불순분자, 빨갱이 짓이라면 오늘부터 자랑스런 불순분자, 빨갱이가 되겠다. 그 대신 조합원을 위해 일하겠다고 해 뽑아줬더니 회사 측과 야합해 노동자들을 등쳐먹는 어용노조는 양민들을 불령선인과 반동,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해 죽음으로 내몬 '일제, 공산, 군사독재 새 빨갱이'라고 명명했다. 줄여서 '친일매국노 새 빨갱이'라고 했다. 거짓말도 100번을 하면 진실이 된다는 식의 거짓말 옹호 속담이 100여개나 되는 일본의 거짓말문화를 답습한 나쁜 기업문화임을 강조했다.

이후 나는 후렴처럼 '친일매국노 새 빨갱이' 타령을 열창했다. 그들이 한마디 하면 두세 마디를 했다.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떠벌렸다. 그러면 그들은 맥이 풀린 듯 꼬리를 사린 채 비실비실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불순분자 빨갱이 타령을 했지만 그건 영락없이 겁을 먹고 도망치는 똥개의 자존심일 뿐이었다. 32년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사이다를 마신 기분으로 내 인생의 가장 유쾌, 통쾌, 상쾌했던 일이었다.

100만 원 이상의 상금이 걸린 공모전만 응모하고, 퇴고 후 아내가 마지막으로 봐주는 검사비가 상금의 3분의 1이지만 그것 역시 묘한 즐거움이었다. 상금을 보고 아내의 동공이 커지며 상금의 절반을 요구해 절충 끝에 3분에 1로 했던 것이다. 분신 등 파괴적인 방법이 아닌 차분한 분노와 글쓰기 등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봉헌도 해야 하고, 저축삼아 우량주도 사둬야 하고, 약간의 돈도 만져보는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소설형식으로 써놓은 장편들이 4-5편이 된다. 해고 후 제과점을 하며 소시민들의 IMF 참상을 그린 '1997년 IMF'와 1990년 단체협약 노사협상 때 민주파의 대표인 나를 노조 측 대의원 대표로 억지로 끌어들여 회사 측을 위한 단체협약으로 만들어놓고는 4개월 후에 있은 노조위원장 선거 때 나에게 뒤집어씌운 '물귀신작전', 등이다. 뿐만 아니라 십 수 편의 중단편과 수 십 편의 엽편 소설들도 있다. 이런 것들도 틈틈이 퇴고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죽을 때까지 여러 가지 문학상과 각종 문예지의 신인문학상에 응모를 하며 최고령 등단을 목표로 도전을 하며 살 생각이다. 내가 쓴 글들이 소설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꿈과 희망을 태양처럼 바라보며 사는 삶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에게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를 불순분자 빨갱이로 매도하고, 16년 청춘을 바쳐 일한 대가인 퇴직금마저 절반만 주고 내쫓은 N라면에게 엎드려 큰절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던 나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환골탈태시켜줬기 때문이다. 분에 넘치는 민주인사로 역사의 페이지에 자랑스러운 흔적을 남기게 해줬기 때문이다. 사그라지던 내 문학의 불씨에 기름을 부어 젊은 시절의 꿈과 희망이었던 영원한 문학청년의 삶을 만끽하며 살게 해준 것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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