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아내가 왔다. 이 머나먼 열대의 나라, 스리랑카의 트링코말리까지.
"아직 당신이 집에 있는 거 같아. 당신이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는 거 같아요. 어떨 때는 목소리까지 들리는 거 같다니까요." 아내가 말했다. 그럴 것도 같았다. 이십대에 결혼한 이후 내가 스리랑카로 떠나올 때까지 우리 부부는 한 번도 떨어져 산 적이 없었으니.
2017년 나는 국제협력봉사단 (KOICA) 제 112기 단원으로 스리랑카에 왔다.
나는 교사로 사십여 년을 지냈다. 대학 졸업 후 퇴직할 때까지 교단에서만 전 인생을 보냈다. 퇴직 무렵 동료교사들의 화두는 "퇴직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어떤 이는 입시학원에 자리를 알아 보았고, 누군가는 한국어강사, 부동산중개사 등 자격증에 도전하고 더러는 개인사업을 계획했다. 공부나 운동 등 취미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교사도 있었다. 나는 국토 종단 도보여행부터 했다.
내가 만약 교사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 육체적인 일을 하는 직업부터 떠오르곤 했다. 제 몸을 움직여, 흘린 땀의 댓가로 먹고사는 삶에 대한 선망은 수렵시대 선조로부터 이어져 온 유전자일 것이다. 아마 그런 속내가 퇴직 후, 도보 여행을 제일 먼저 시작한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코스는 옛날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시험 보러 다녔던 길을 택했다. 1인용 텐트와 침낭, 트레킹화를 사고, 취사도구를 장만했다.
도보여행에서 깨달은 것은 몸의 존재감이었다. 평소에 몸은 너무나 당연히 있는 것이여서 돌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길 위에 나서서 장거리 도보를 시작하자 몸은 상전이 되었다.
그날 그날 몸을 먹이고 재우는 것은 1순위의 숙제였다. 종일 걷다가 숙소가 나타나지 않으면 텐트를 쳤다. 밤하늘을 지붕삼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해가 뜨면 텐트를 걷어 등에 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나에게는 남다른 경험이 있었다. 학교에서 해양소년단 담당 교사였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해양 훈련을 떠나곤 했다. 한겨울, 삭풍이 부는 낙동 강변에서 야영을 했다. 동아리 회원들과 뗏목을 만들어 강을 타고 내려오는 혹독한 훈련을 겪어낸 나 였다.
끝없는 문경새재 길을 걸을 때, 나는 그 다음 해에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보 초반, 몇 번 야영을 했다. 몸과 옷은 땀에 절어 버석거렸고, 용변과 세수는 공중화장실에서 해결했다.
그런 어느 날, 길 위에서 지나가는 빈 택시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기사님에게 제일 가까운 우체국으로 가 달라고 했다. 우체국 택배 박스에 지고 다니던 텐트와 배낭, 버너와 코펠 등을 담아 집으로 부쳤다. 큰 맘 먹고 퇴직금의 일부를 헐어 장만한 유명 메이커의 장비들이었다. 성능 좋은 유명 메이커 장비에 대한 욕망이 내게 있었다. 들판에서 집이 되어 준 텐트와 취사도구를 떠나보낼 때 화려한 장비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그제야 몸이 가벼워졌고 마음도 가벼워졌다. 먹고 자기 위해 무거운 장비를 지고 다니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도보의 일정을 숙소 기준으로 다시 짰다. 먹거리는 잠자리보다 챙기기가 쉬웠다. 걷다가 슈퍼나 가게가 나타나면 비상식량을 비축했다. 과일과 물, 비스킷과 삼각 김밥 정도면 충분했다. 적당한 식당이 없어도 한, 두 끼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면 족했다.
지칠 때면 옛 선비들을 떠올렸다. 짚신을 신고 부실한 잠자리와 거친 식사로 문경새재를 넘어 목숨 건 과거 길에 올랐던 선비들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평생을 과거에만 매달렸던 선비들도 많았다고 들었다. 나는 짚신이 아니라 쿠션 좋은 트래킹화에 더운물, 찬물 나오는 안전한 숙소에서 자는 현대인이고 식당을 만나면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과거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다.
633키로 22일간의 도보가 끝나자 체중이 6키로 줄고 발톱 2개가 빠졌다. 족저근막염도 생겼다. 오래 병원에 다녔지만 완치 되지 않았다. 이전처럼 오래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해냈다는 성취감은 있었다. 족저근막염은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훈장으로 여기기로 했다. 빠진 발톱은 서서히 자라났다.
발톱이 천천히 자라면서 마음속의 욕망도 함께 자랐다. 한국을 떠나 살아 보고 싶었다. 문경새재 길을 하염없이 걸을 때 더 멀리, 더 낯선 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다. 젊었을 때부터 가져 본 생각이지만 현실의 족쇄 때문에 결행할 수 없었던 꿈이었다. 평생 한번은 다른 나라에서 살아봐야 할 것 같았다. 토리노, 토스카나, 안탈리아, 랑카위, 페낭, 우붓, 스미냑 …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이국의 도시들이 많았다. 지구 위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어쩌다 태어난 곳에서만 평생 살다 죽는 건 아쉬웠다. 더 늦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래도 트링코말리라니. 생각도 본 적도 없는, 생판 처음 듣는 곳에 나는 와 있었다.
2016년 나는 KOICA 국제 협력 봉사단에 컴퓨터 부문으로 지원했다. 2017년 코이카 112기 단원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되었다. 막상 낯선 곳으로 떠나려니 설레이면서 겁이 났다. 하지만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날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던졌다. 까다로운 절차와 교육을 마치고 스리랑카 행 비행기에 올랐다. 퇴직자인 나는 시니어 단원이지만 대부분의 일행은 이, 삼십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만큼 일할 자신이 있었다. 자식 또래의 단원들과 동료가 된 것도 좋았다.
콜롬보에 도착하자 한증막 같은 더위가 훅 다가왔다. 숨이 턱 막혔다. 도착시간이 깊은 밤, 새벽인데도 더웠다. 몇 달이 지나도 계절이 바뀌지 않고 일 년 내내 더위만 계속 되는 나라, 평생을 덥기만 한 나라. 이 더위 속에서 2년을 살아야 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더위에 약하고 모기가 싫었다. 추운 것은 잘 견뎠다. 과연 내가 이 더위를 견딜 수 있을까. 무모한 일을 벌렸다는 후회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엄습했다. 하지만 일행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후회나 조바심과 상관없이 112기 봉사단원은 현지 사무소 직원의 안내에 따라 분주히 다음 일정에 들어갔다.
콜롬보에서는 현지적응 훈련이었다. 연수원에서 교육을 이수한 단원들이 현지에 파견되어 살아보는 체험 훈련이었다. 단원들이 현지인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부임지에 가, 2년간 살 집을 직접 구하는 등의 실습을 하는 것이었다.
내게 배당된 콜롬보의 홈스테이 집은 열악했다. 방이 관처럼 길고 좁았다. 창이 없어 환기가 안 되고 어둡고 답답했다. 댕기열을 조심하라고 교육을 받았지만, 모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냄새나는 어둑한 방에는 무는 벌레도 있어서 최대한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쨌건 임시 숙소이고 적응 기간이므로 꾹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었다.
부임지가 발표되었다. 파견지가 결정되면 그 곳으로 가서 2년간 지낼 방을 구해야 하는데, 나는 콜롬보로 배정되었다. 다행이었다. 단원들이 부러워했다. 안전하고 편리한 수도이니 큰 불편은 없을 거라고 했다. 공기는 나빴다. 우리나라의 서울처럼. 코이카 사무실도 콜롬보에 있어서 정보를 얻거나 도움을 받기도 쉬웠다. 단원들이 모이는 집결지도 수도 콜롬보였다. (스리랑카의 입법 수도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이다) 그런데 한 여자 대원이 울상이었다. 배정지가 트링코말리라고 했다. 처음 듣는 지명인데 스리랑카 북쪽의 타밀지역이라고 했다.
트링코말리는 우리나라 동해안과 비슷한 만(灣)으로 교통이 불편한 오지다. 봉사 단원들은 모두 싱할라어 교육을 받았다. 타밀어 사용이라니. 언어권도 다른, 변두리 지역으로 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단원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코이카 봉사단에 선발되어 콜롬보에서 현지 적응훈련을 받기까지 까다로운 검증을 받고 연수원에 입소,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 콜롬보까지 와서 이제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돌아가겠다니. 내가 그 단원을 대신하여 트링코말리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고생은 아내 몫이 되었다. 한국에서 아내가 나를 보러 왔는데 콜롬보공항에서 트링코말리까지 가는 길이 문제였다. 버스로 8시간 걸리는 장거리였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스리랑카로 오느라 이미 진이 빠진 아내였다. 나 역시 아내를 마중하기 위해 전날, 심야 버스를 타고 밤새 달려 새벽에 콜롬보에 도착해 대기했었다.
아내는 핼쓱했다. 긴 비행에 지쳐 풀기빠진 야채처럼 쳐진 아내를 버스로 8시간을 달려 트링코말리로 데려갈 수 없었다. 기차 편도 만만치 않은 고생길이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공항택시 기사님은 멋쟁이였다. 회사원처럼 몸에 착 붙는 검정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 차림이었고 영어도 곧잘 했다. 삼십 대로 보이는 기사는 다섯 시간 쯤 걸릴 거라 했다. 차가 좋다, 영어를 잘 하네요. 아내의 칭찬에 기사님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외국에서 몇 년간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지금의 차를 샀다고 했다. 스리랑카에서는 차 한 대가 웬만한 집 한 채보다 비쌌다. 세금이 아주 많아서 차가 있으면 부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아내는 인천 공항 파리 바게트에서 사온 빵을 기사님에게 권했다. 아내는 빵을 한보따리 사왔다. 스리랑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것을 대비해서 였다. 댕큐. 기사님도 기꺼이 빵을 받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아내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빵부스러기가 흘린 곳을 훔치자 기사가 가까운 곳에 우리집이 있다, 씻으러 가자고 권했다. 이곳의 문화를 모르는 아내는 노, 라고 했지만 황당했다. 운전 중인 기사가 이런 제의를 해도 되나 싶었다. 아마도 외국인에 대한 다정한 배려같았다. 한참을 달리다 아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오케이. 기사님은 차(TEA)를 파는 가게로 우리를 안내했다.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한 후,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바람도 쐬었다. 상품 강매 같은 것은 없었다. 차 가게의 종업원도 매너있고 친절 했다.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자가용을 불렀다. 집주인 사위의 차를 이용했는데 이 나라 물가로는 비용이 무지하게 비싼 셈이었다. 스리랑카에서는 개인 차량의 영업 행위가 합법적이라 했다.
한국에서 당연했던 일상이 여기에선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택배가 없고 소포도 받기 어려웠다. 인터넷이 느리고 술집과 밤문화가 없었다. 단수와 정전이 빈번하고 정보를 구할 수 없고 말이 안 통하지 않아서 나는 벙어리 신세에다 문맹자이기도 했다. 종일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날이 많았다. 시간은 많은데 할 일이 없었다. 헬스 같은 체육시설이 없었고 공부할 여건도 되지 않았다. 아는 사람도 친구도 없어 외로웠다. 그런 차에 아내가 왔다. 아내가 아니라 한국이 온 거 같았다.
처음 트링코말리에 도착했을 때는 의욕에 차 있었다. 곧장 타밀어 개인교사를 수배해 현지어 공부를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해 온 싱할라어는 타밀지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타밀어 개인지도 교사는 은행원이었다. 퇴근 후 내 집으로 와서 렛슨을 했다. 그는 걸핏하면 지각에다 결강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나라 문화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어기는 걸 예사로 여겼다. 한국의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나는 그런 타밀어 교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불성실하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 졌는데 그의 영어와 나의 영어가 많이 달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렛슨을 빼먹는 날이 늘고 타밀어 실력은 도통 늘지 않았다. 차라리 집주인 아저씨와 대화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집주인 아저씨는 퇴직한 철도공무원으로 영어를 조금 했다. 은행원과의 렛슨은 석달 정도 지난 후, 중단되었다.
집주인 아저씨는 내전 참가자라 했다. 이 나라에는 오랜 내전이 있었다. 종교갈등, 인종 분쟁도 원인이었다.
1983년 북부 자프나에서 정부군 몇 명이 타밀인에 살해 되었다. 자프나는 타밀 지역이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싱할라인은 타밀인을 대량 학살했다. 스리랑카인의 70%는 싱할라 인이고 불교를 믿는다. 20%가 타밀인으로 힌두교를 믿고, 10%는 무슬림이었다. 이 일로 인해 <타밀해방타이거>라는 반군이 결성 되었다. 타이거는 타밀인의 상징이다. 싱할라인의 상징은 사자라고 했다.
싱할라인을 향한 테러가 2009년까지 이어졌다. 내전으로 8만여 명이 사망하고, 26만 여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현재 내전은 종식 되었지만 오랜 공포와 혼란은 스리랑카인의 마음속에 깊은 내상을 남겼을 것이다.
나는 트링코말리 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다. 학생은 우리나라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2학년생까지였다. 학생들은 졸업하면 전문대나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취직 했다.
학교에서는 토막 영어와 바디 랭귀지로 소통했다. 한국말은 쓰기나 들을 기회가 없었다. 집주인과는 토막 영어에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 했다. 트링코말리에 파견된 단원은 나와 김 선생 두 사람이었다. 미혼인 김은 나와 약간 떨어진 거리에 살았지만 교통이 불편해 자주 볼 수 없었다. 김은 가끔 툭툭을 타고와 내 집에서 맥주를 마시다 가곤 했다. 코이카 단원들은 차량을 구매할 수 없었다. 대중 교통이 열악한 것이 트링코말리의 생활 중에 제일 힘든 부분이었다.
트링코말리에서는 동물과 사람이 어울려 살았다. 개, 사슴, 소 같은 짐승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고삐나 줄도 매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숫자가 많은 것이 새인 것 같았다.
이곳의 나무들은 연중 더운 기후 탓인지 크고 무성했다. 거대한 나무들은 사원이 아닌 도시에도 많았는데, 그 큰 나무들에 갖가지 새들이 살고 있었다.
새들은 일어나는 시간이 제각각 달랐다. 창밖이 어두컴컴한 새벽 4시경이면 새들은 기상 했다. 찌르르르 쪼쪼쪼 ~~ . 제일 먼저 일어난 새가 기상나팔을 불었다. 우리나라에서 닭 울음소리로 하루가 시작 된다면 이곳에선 새소리로 하루가 열렸다.
1번 새의 독주가 끝날 즈음 2번 타자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쭈삐쭈삐... 쪽쪽쪼옥. 질세라 3번 주자가 등장한다. 어느덧 뚜엣이나 트리오가 되기도 하면서 계주가 이어지는 동안 새벽은 천천히 어둠을 벗었다.
처음 한동안은 새소리가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녹음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그곳에 살 때는 시간이 지나자 신기함은 사라지고 짜증만 솟았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새소리는 성가셨다. 알람시계라면 내가 조정하겠지만 새소리는 그럴 수 없었다. 어디서 나는지 모르는 자연의 소리를 향해 나는 "제 발 잠 좀 자자!" 이불을 뒤집어쓰며 맞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때로는 창밖으로 뭔가를 집어 던진 적도 있었다.
스리랑카의 새는 공중에서 살지 않았다. 육지에서 인간과 함께 살았다. 나무 가지나 베란다, 난간, 전깃줄에 앉아 먹을 게 없나, 인간의 동정을 살폈다. 어느 날 이었다. 샤워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돌아보니 창턱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쉬익! 손사래를 치며 쫓았다. 녀석은 구슬처럼 빤질거리는 눈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트링코말리 새들은 인간을 겁내지 않았다. 길거리의 가축도 그랬다.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소나, 개, 사슴들은 대문이 열려 있는 집이 있으면 이웃사람처럼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어슬렁거리며 돌아 나왔다. 먹이를 찾는 것 같았다.
내 집은 2층이었다. 1층엔 주인집이 사는데 옆집의 망고나무가 내 베란다 난간까지 뻗어 있었다. 이 나라의 나무는 웬만한 집이나 건물보다 키가 컸다. 새들은 무성한 나뭇가지 뿐 아니라, 내 베란다 난간이나 빨랫줄, 전선에도 터줏대감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새똥을 피해 수건 같은 빨래도 실내에 널었다. 그런데 샤워하는 인간을 지켜보는 새라니. 욕실 창문을 열어 놓았던 게 실수였다. 녀석은 내가 쉬잇! 소리치며 쫓아도 태연히 창턱에 앉아 나를 구경했다.
아침의 샤워물은 데울 필요 없이 미지근했다. 전날 옥상의 물탱크에서 종일 달구어진 탓이었다. 이곳의 태양은 무지막지해서 땡볕에 나서면 피부가 익을 것 같았다. 물에는 석회 성분이 많아서 물기가 마르면 피부에 하얀 석회가 남았다.
스리랑카엔 유독 망고나무가 많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망고 묘목을 한 그루 심었다가 그 아기가 성장하여 결혼하면 출생 때 심은 나무의 망고를 수확해 잔치 때 쓴다 했다. 망고나무는 잎도 무성하여 온갖 새들이 깃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스콜이 오면 새들이 줄지어 나무에서 나왔다. 비를 피하러 집으러 가는 것 같았다. 작은 비는 그냥 나뭇가지에 있었다. 망고나무숲에서 새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면 큰 비가 온다는 신호였다. 새들이 나뭇가지에서 줄지어 나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딸이 휴가차 왔을 때 였다. 콜롬보의 골 페이스(Galle Face) 호텔에 갔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던 때였다. 골 페이스 호텔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유서 깊은 호텔이다. 테라스가 인도양의 아름다운 해변으로 이어져 유명인이나 현지의 부유층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테라스는 인도양을 향해 탁 트인 노천 카페였다. 열대의 바다를 감상하느라 넋을 잃고 있는데 저만치 떨어져 있던 종업원이 뛰어 오기 시작했다. 긴 장대를 치켜들고. 골 호텔의 종업원들은 무더위에도 정장차림이었다. 넥타이에 와이셔츠를 갖춰 입거나 전통복장 차림새였다.
바다로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시야가 트인 전망에서 종업원들의 패션도 인테리어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딸은 감탄하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신나게 달려 온 종업원은 우리 테이블 앞에서 딱 멈추었다. 딸은 우리가 무얼 잘못했는가 싶어 의아해했다. 그 순간 딸 옆 테라스 난간 위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종업원은 허공을 향해 긴 장대를 휘저었다. 그거 였다. 딸의 디저트, 망고 케익. 새 한마리가 진작부터 딸의 망고 케익을 노리고 난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딸은 그저 사람을 겁내지 않고 가까이 온 새의 용기(?)에 감탄했었다. 어머! 아내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난간의 새는 날아오르며 정확하게 접시 위의 망고 케익을 채갔다. 순식간이었다. 새는 금새 허공으로 사라졌고 종업원은 공연히 새를 쫓는 척했다. 새 쫓는 일. 그게 그 사람의 일이었다. 얼마나 낭만적인 직업인가. 딸은 새 쫓는 사람이 오래오래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혹시 우리 집의 행주 분실 사건도 새의 짓이 아닐까.
딸이 방문하기 전, 주말이면 아내와 가까운 여행을 떠났다. 평소에는 학교 수업 때문에 집 근처만 돌다가 주말이면 조금 먼곳까지 다녀오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집 안이 표시 나게 청소되어 있었다.
화장실 변기, 주방의 가스렌지 같은 것이 반짝거릴 정도로 깨끗해져 있었다. 집을 비우고 외출하면 주인집에 열쇠를 맡겼다. 행선지와 일정도 알렸다. 그런데 우리가 없는 사이에 주인집에서 청소를 한 것 같았다. 한번이 아니었다. 조금 긴 외출에서 돌아오면 번번이 그랬다. 뚜렷하게 표시가 날 만큼 청소가 되어 있는 것이 황당했다. 한국이라면 무단 침입이었다. 세입자가 없는 사이에 집주인이 들어오다니. 하지만 한국식 잣대로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은 동네에서 좋은(?) 집이었다. 타일로 마감된 2층집은 집주인의 큰 자랑이었다. 딸이 영국에서 돈을 벌어와 지어 주었다고 했다. 집에 대한 집주인의 애정과 프라이드는 대단했다.
어느 날, 집안에서 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하고 문을 열어보니 집주인이 싱글 거리고 서 있었다. 친척이나 지인들에게 집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거였다. 세입자인 나의 양해를 구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한국에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전 양해도 없이 세입자의 사생활 공간으로 들어오겠다니. 하지만 이 나라에선 그게 아닌 거 같았다.
나의 거절 따위는 상상해 본 적도 없다는 얼굴로 집주인이 웃고 서 있었고, 방문자들은 벌써 내 집으로 다리부터 집어넣었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내 침실의 문을 열고 주방과 욕실로 돌아 다녔다.
내 집은 25평 정도로 방 3개, 거실, 욕실, 주방이 있었다.
한번은 아내가 식사 중일 때 또 집 구경을 왔다. 이리 저리 둘러보던 그들은 아내가 먹던 한국음식에 호기심을 보였다. 아내가 별도 그릇에 음식을 덜어 건네자 맛을 보고 품평을 하는지 저희들끼리 고개를 흔들며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청소 문제에 대해 주인 영감님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이 청소를 했느냐? 주인 영감은 자랑스런 얼굴로 변기 청소하는 사람을 불러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 비용이 ** 루피 들었고, 주방 청소는 나의 와이프가 했다고 말했다. 오 댕큐. 나는 차마 그러지 마시라, 내 집에 예고 없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 하지 못했다. 자랑스러워하는 집주인의 태도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고 피차 영어가 짧았다. 집주인과는 토막 영어와 바디랭귀지로 대화 하는데 거의 눈치로 짐작하는 수준이었다.
새카만 피부에 눈망울이 커다란 주인 영감님은 타밀 전사 였다고 누군가 알려 주었는데 머리와 콧수염이 하앴다.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빠릿빠릿하고 박력이 있었다. 어쩌면 보기보다 나이가 젊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늘 상의는 알몸인 채 아래에만 싸롱 하나 걸치고 있었다.
변기 청소비용, **루피는 치르지 않았다. 그랬다간 계속 빈집 청소를 할까봐 걱정 되어서 였다.
주인집에서 종종 가족의 행사에 나를 초대했다. 사양했더니 케익조각과 생일음식을 아이를 통해 올려 보냈다. 대가족이 인근에 사는지, 손주나 손녀가 자주 들락거렸다. 생일엔 케익을 먹었는데 케익 색깔이 원색이었다. 초록, 분홍 등 요란한 색깔의 케익은 풍부한 과일 탓 일지도 몰랐는데 나는 인공 색소가 떠올라 선뜻 먹지 않았다.
초대를 매번 거절해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나를 가족처럼 챙겼다.
한번은 제법 먼 여행에서 돌아와 집앞에서 내렸는데, 마침 대문께에 나와 있던 주인 영감님이 우리를 보았다. 기사님에게 우리에게 차비로 얼마를 받았는지 물었다. 출발지와 요금을 들은 주인 영감님은 기사에게 불 같이 화를 냈다.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웠다는 것이었다. 의외로 기사님도 아저씨의 호통에 고분고분했다. 반발하지도 않던 기사님은 2층을 올려다보더니, 집 좋다. 방도 많겠다. 오늘 밤 이 집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 허락해 달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 갈 길이 멀어서 자고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감님은 "차비를 그만큼 받았으니 호텔에 가서 자라" 박력 있게 그를 내쫓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룻밤 재워달라는 기사님이나, 바가지 씌웠다고 제 자식에게처럼 야단치는 영감님이나.
행주 사건은 이랬다. 아내와 집에 있을 때 였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면 행주를 빨아 싱크대에 널어 두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행주가 없어졌다. 우리집은 밤새 문을 잠그고 잤다. 밤사이 올 사람도 없었다.
도둑이 들었다면 행주를 가져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비(非) 인간의 소행일까. 집안에 찡쪽(도마뱀)이나 쥐도 없었다. 댕기 모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방충망으로 창문도 다 가리고 에어컨을 틀고 지내던 중이었다. 그런데도 아침이면 계속 행주가 사라지니 이상한 일이었다.
사라진 행주는 가스렌지 밑에 찡박혀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골 페이스 호텔에서 케익을 훔쳐 가는 새를 보자, 우리집 행주도난 사건의 범인이 새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내 집의 빈틈(?)은 천정 뿐이었다. 천정의 틈새로 드나들 생명체는 새 뿐일 거 같았다.
우리 집은 근사한 집인데도 비가 샜다. 겉보기엔 멀쩡한 집인데도 그랬다. 한국과 건축기술에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삼각형으로 맞닿은 천정 어디엔가 아귀가 맞지 않는지 비만 오면 양동이를 받쳐야 했다. 주인 영감님은 사람을 불러 몇 번 손을 보았는데 비새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천장 어딘가에 비가 새는 구멍이 있고 그 틈새로 새가 드나드는 것 같았다. 새 들은 인간이 남긴 음식을 먹었다. 새가 먹이를 찾아 부엌에 들어 왔던 것일까. 그렇다면 행주는 왜 가스렌지 밑으로 끌고 들어 갔을까.
가스렌지는 타일로 마감된 씽크대 위에 있었다. 타일로 된 씽크대 위에는 가스렌지와 식기 건조대, 수납찬장이 있었다. 식기 건조대는 노출되어 있고 찬장은 유리문으로 닫혀 있었다.
새는 몸집이 작을 것이며 가스렌지 밑에 잠자리를 만든 것 같았다. 노출된 공간을 피해 가스렌지 밑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되었다. 둥지를 아늑하게 하기 위해 포근한 행주를 끌고 갔을 것이다. 거즈로 된 행주는 한 시간이면 충분히 건조 되었으니까.
의문은 귀국할 때까지 풀리지 않았고, 행주 증발도 계속 되었다. 어쩌면 새들은 이방인인 내가 떠난 후, 더 편하게 부엌엘 드나들었을 것 같다. 트링코말리사람들은 동물과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하니까.
스피커를 단 차량이 동네를 시끄럽게 흔들며 천천히 지나갔다. 나중에야 그게 단전이나 단수를 예고하는 방송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타밀어를 모르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전은 양초와 후레쉬를 준비했고, 단수는 물통에 물을 미리 받아 놓았다. 머리를 감거나 요리를 하는 중에 물이 끊기는 수가 많았다.
물을 받아 놓으면 바닥에 황토색 흙이 가라앉았다. 지푸라기나 찌꺼기 같은 게 뜨기도 했다. 샤워 후 피부가 마르면 표면에 석회가 꺼칠거리며 남았다.
트링코의 대지는 황토다. 길의 한 가운데는 2차선 정도의 폭으로만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나머지 부분은 붉은 황토가 노출되어 있었다.
김은 현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서 직접 밥을 해 먹었다. 단원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 아내도 현지 음식을 먹지 못했다.
김은 시간이 나면 식재료 구입하러 원정길에 올랐다. 주로 콜롬보로 갔다. 콜롬보에 가면 한국 식재료를 구할 수 있고 찰진 쌀도 구할 수 있었다. 이곳 쌀은 밥을 하면 풀풀 날렸다. 김밥을 썰면 칼이 지나가기 바쁘게 밥알이 모래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김은 버스로 8시간을 달려 먹거리를 구해, 이고 지고 돌아 왔다. 택배는 없고 소포는 언제 도착할 지 몰랐다.
나는 먹기 위해 김처럼 수고를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처음부터 주인집에 식사를 의뢰 했다. 나는 현지식을 잘 먹었다. 오랜만에 된장찌개, 김치찌개, 육개장을 먹었다. 음식이란 무엇일까. 아내가 만들어 준 한국음식을 먹자 내 속에 서 잠자던 한국인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현지식을 좋아한다고 믿었는데 한국음식에 내 몸의 세포가 환호하며 눈을 떴다.
트링코말리에는 적당한 식당이 없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네덜란드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오픈 시간이 늦은데다 교통이 불편했다. 손님 접대 할 경우에나 이용할 뿐이었다.
아내는 한국음식을 만들어 김을 초대했다. 콜롬보까지 식재료를 사러 다니는 김을 안쓰러워했다. 김이 돌아갈 때 밑반찬과 음식을 이것저것 챙겨 주었고 김은 감읍하여 우리 부부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김의 집 상차림을 본 아내가 입을 딱 벌렸다. 음식이 아니라 그릇 때문이었다. 일본의 유명한 자기 그릇, 노리다케로 식탁은 세팅되어 있었다. 찻잔이나 물잔까지 노리다케 세트였다. 새신부가 혼수로 장만한 그릇들 같았다.
김은 결혼할 의사가 없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PC방을 운영했었다. 영업은 괜찮게 되었다. 점포의 입지도 대학가라 좋았다. 문제는 돌아서면 쏟아지는 새 기종의 컴퓨터였다. 한국은 게임과 기계의 순환이 엄청 빨랐다. 손님들은 신형 컴퓨터가 장착된 가게로 흘러 나갔다. 열심히 벌어 새 기기를 장만하기 바빴다. 소모적인 영업을 오기로 버텼다. 독신이라 그나마 가능했다. 아내와 자식이 딸렸다면 어림도 없었을 거였다. 결국 PC방을 접으며 김은 가정을 꾸릴 꿈도 접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봉사단원으로 캄보디아로 떠났다. 스리랑카는 두 번째 파견이었다. 임기가 만료되면 또 다른 나라로 떠날 생각이라 했다. 드론과 함께.
김은 드론을 좋아했다. 사람 없는 오지의 해안이나 바람 부는 개활지에서 드론을 띄웠다. 한국에선 비행금지구역이 많아 드론 비행에 제한이 많았다고 했다. 교통이 불편하여 가지 못하는 곳이나 사람이 들어가기 열악한 곳도 드론은 가리지 않았다. 자신의 분신 같은 드론이, 혼자 보기 아까운 영상을 보내오면 구글에 올리기도 하면서 그는 혼자의 삶을 이어갔다.
단원들이 그랬다. 일과를 마치면, 시간을 보낼 도구가 없었다. 이 나라에는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할 기반이 갖춰져 있지 않았고, 해가 지면 사방은 캄캄했다. 누군가는 좋은 그릇을 사 모았고, 누군가는 질 좋은 면직물이나 보석 수집에 마음을 쏟았다. 한국에선 마시지 않던 음주를 시작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단원도 있었다. 김은 드론을 택했고 나는 술을 마셨다. 저녁의 산책에서 돌아와 맥주나 아락을 홀짝거렸다.
아내는 김 다음으로 학교의 교직원들을 초대했다. 김밥, 닭도리탕, 소고기 장조림, 꽃게탕, 새우장, 잡채를 만들었다. 6명의 선생들이 말끔한 옷을 입고 선물을 하나씩 들고 왔다. 나는 술을 내놓았다. 종교적인 이유와 문화 때문에 현지인들은 술을 기피했지만 누구도 캔맥주를 사양하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서로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호기심과 호의, 눈치와 토막영어, 바디 랭귀지를 섞어 흥겨운 시간이었다.
하루에 한번 스콜이 쏟아졌다. 쨍쨍하던 하늘에서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무겁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하늘 한쪽 끝에서 비구름이 다가 왔다. 대기가 습해지면 집안에서 여자들이 나와 빨래를 걷었고 나뭇가지에서는 새들이 날아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끝도 없이 나무에서 새가 나오는 날은 비가 많이 왔다. 가벼운 스콜일 때는 새들이 나뭇가지에 남아 비를 맞았다. 많은 비가 오면 땅바닥의 흙이 파였고, 전에 없던 고랑이 생기고 길바닥에 요철이 생기기도 했다.
스콜이 한바탕 지나가면 나뭇가지는 소년들의 차지였다. 새들이 떠난 가지에 소년들이 모여 들었다. 아이들은 높은 가지에 올라 바다를 보고, 바다 건너를 보았다. 비를 받은 만(灣)의 바다는 녹색이나 회색빛이었다. 나무 둥치 밑에는 아이들이 타고 온 자전거가 서로 기대거나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소년들은 동네 어른들과 떨어진 나뭇가지에 올랐는데 그들은 또 하나의 새처럼 보였다.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치거나 수다를 떠는 무리 사이에 가끔 반딧불 같은 담뱃불이 떠올랐다. 그러면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 앉아 바람을 쐬던 동네 어른들이 혀를 찼다. 쯔쯔.
나뭇가지에서 시시덕거리던 소년들은 어두워지면 떠났다.
나무에 올라간 아이들 중에는 내가 나가는 학교의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인사하는 아이는 없었다.
떠나오기 전 하모니카를 연습했다. 언어가 부족해도 음악으로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모니카를 불며 이국의 아이들과 노래하는 모습을 그렸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열심히 가르치고 싶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은 공부해 가며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러나 컴퓨터실을 찾는 학생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름이 뭐니? 몇 살?" 정도의 대화 밖에 할 수 없었다. 컴퓨터의 기본 사용법을 가르치고 자판 연습을 시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컴퓨터실에 올 수 있었다. 학생들 집에는 컴퓨터 없었다. 교사들도 비슷했다. 개인 PC는 지급되지 않았고 교장실에만 컴퓨터 1대가 있었다. 교장도 컴퓨터를 잘 사용하지 못했다. 지금의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다.
가끔 게임을 하고 싶다고 컴퓨터실을 찾는 학생이 있었다. 그나마 뭔가 들어본 아이들이었다. 여기는 게임방이 아니다. 그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코이카에서 지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판부터 외우고 기능키를 익히게 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자판을 외우지 못했다. 사용할 일이 없으니 자판을 익힐 필요도 못 느꼈을 것이다.
교사들에게 컴퓨터의 중요성을 알리려 했다. 교사들은 수줍어하며 쉬이 다가 오지 않았다. 교무실의 공문서에 착안했다. 컴퓨터의 편리함을 직접 느끼게 해 주기로 했다. 행정적인 공문서를 컴퓨터로 정리했다. 복잡한 전산과 서식을 문서화 해 컴퓨터로 출력, 배포했다. 교사들은 놀라워했다. 히트작은 엉뚱한데서 터졌다. 학교 행사 모습을 컬러 프린트로 출력했더니 모두들 깜짝 놀랐다. 아주 좋아했고 화제가 되었다. 출력 사진은 학교 곳곳에 광고 화보처럼 나붙었다.
그 후 교사들이 컴퓨터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집안 행사 같은 개인적인 사진을 가져와 출력을 부탁했다. 돌 사진, 결혼사진, 장례식 사진, 생일 사진 등등 사연도 가지가지 였다. 정중히 거절했다. 컴퓨터와 컬러 프린트 잉크는 공적인 비품이다,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상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거절하느라 힘들었다. 기회에 직접 배워서 해보시라, 교사들은 꽁무니를 뺐다.
사진 출력만을 원하던 교사들이 서운해 하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량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티타임이면 같이 차를 마시던 동료들이기도 했다. 눈 질끈 감고 출력해 줬어야 하나.
교사들의 개인 사진 출력 요구 사건 이후 교장이 나를 호출했다. 학교에 카메라가 필요하다고 했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큰 축제가 있을 예정이다, 그때 사용할 카메라를 지원해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코이카의 지원은 예산과 시기가 정해져 있다. 학교에서 요구한다고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응책으로 내가 축제 때 사진사로 나섰다. 개인 카메라를 들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지만 교장은 아쉬워했다. 한국의 아내에게 들어올 때 카메라를 하나 사 오라고 부탁했다. 돈은? 아내가 물었다. 우리 돈으로. 꼭 그래야 해요? 응. 꼭 그래야 하오. 비슷한 비난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굳이 남의 나라에 돈을 퍼주어야 하느냐. 나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도 전후에 엄청 어려웠다. 그때 다른 나라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나라는 빨리 일어설 수 있었다. 당연히 갚아야 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하는 방법, 즉 인간의 폭력성에 항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협력이다. 공생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협력적 경쟁을 해야 한다. 생물학자들이 연구하고 설파한 이론이었다.
축제 때 내가 찍은 사진은 발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교 축제라고 모두들 꽃단장을 하고 왔다. 학생이나 교사나 학부형들까지. 화장을 하고 머리와 몸에 화려한 장신구를 치렁치렁 달고 왔다. 그런데 대부분 맨발이었다. 거의 맨발로 다니는 이곳의 학생들은 발이 고목 같았다. 아직 아기 같은 초등학교 1학년 꼬마 아가씨도 입술에 빨간 루즈를 바르고, 뽀얀 분화장으로 잔뜩 멋을 부렸는데 발은 거친 맨발이었다. 발등까지 초콜릿 빛인 피부는 발로 내려가면 야생의 나무토막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안쓰럽고 민망하여 차마 맨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운동 시간에는 더 했다. 쉬는 시간이나 체육시간에도 아이들은 맨발로 공을 찼다. 아이들은 보호 장비 없이 맨 땅에서 뜀틀로 뛰어 올랐다. 다치는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에는 변변한 치료약도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상비약에 필요한 물품을 보충해 구급상자를 비치했다. 모자라는 품목은 한국의 아내에게 부탁했다. 연고를 종류대로 사 달라, 소독약, 카메라, 녹음기 등을 사오라고.
의논할 일이 있다고 B단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B단원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어 강사로 파견된 삼십대 아가씨였다. 몇몇 단원들과 약속장소에 모였다. 한국어 교실이 폐쇄될 위기라고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수강 학생 수가 줄어 들어, 그녀는 콜롬보 사무실로 귀환될 처지였다. B는 코리아 페스티벌을 개최하겠다고 했다. 지역민들에게 한국을 알려, 한국어에 대한 관심을 유도, 한국어교실을 유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코리아 페스티벌은 큰 행사다.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었다. 많은 단원들이 도와주어야 치를 수 있는 대규모 축제였다. 큰일을 벌이려는 B단원의 의욕이 가상했다. 모두들 아이디어를 내고 역할을 나누었다. 한국을 떠나 고생하는 동료에게 동병상련의 지원을 보냈다.
B단원은 서울을 떠나온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방금 입국한 사람처럼 뽀앴다. 선크림을 부지런히 바른다고 했지만 한국인은 유난히 하앴다. 같은 아시아인들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흰 편이었다. 코리아 페스티벌은 성공리에 끝났다.
나는 김이나 B 등 젊은 단원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할 일을 찾아, 살 길을 찾아 이역만리까지 나서는 이들이었다. 자기 발전과 새로운 세계로의 도전 정신이 대단했다.
2019년 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마스크 공장에 일하러 다녔다. 공장에서는 완성된 제품을 검사했다. 생산직 사원들은 기계 옆에 붙어서 종일 일했다. 앉을 의자도 없었다. 검사실의 나는 의자가 있었다.
현장에는 외국인 근로자 모녀가 있었다. 엄마와 딸이 같이 일했는데 멀리서 날아온 새처럼 공장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둘이만 붙어 다녔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들어와 검사실 불을 켰더니 누군가 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외국인 모녀 중 딸이 검사용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얼굴을 무릎에 묻고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들 모녀도 이렇게 번 돈으로 고국에 돌아가 집을 사고 차를 살까. 조용히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채소밭으로 갔다. 공장 옆 빈터에 채소밭이 있었다. 공장 근로자 중 누군가가 빈 땅을 이용해 농사를 지은 곳이었다. 채소는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져가 먹을 수 있었다. 아마 부지런한 농부 출신의 근로자가 농사를 지었으리라.
새파란 무청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스리랑카의 무성한 망고 나무가 떠올랐다. 나는 스리랑카 주인집의 영감님처럼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골 페이스 호텔의 새 쫓는 이가 오래오래 있었으면 좋겠다던 딸은 결혼하여 아이 엄마가 되었다.
망고 나무에 앉았던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할까.
맨발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이 후회된다. 유명 메이커 신발보다 그들의 맨발이 훨씬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석회가 서걱거리던 수돗물과 해만 지면 다가오면 태초 같던 어둠도 그립다. 그들처럼 살았다면 지금의 감염병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푸른 무우청밭을 향해, 나뭇가지 위의 새 같던 아이들에게 가만히 인사를 건넨다. 아유보완? 아직 내게 시간이 남아 있을까. 그때의 어리석음을 만회할 시간이. 빅톨 위고가 그랬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이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 '아유보완'은 안녕하세요,라는 스리랑카 인사말이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다시 보이네 와"…참사 후 커뮤니티 도배된 글 논란
"헌법재판관, 왜 상의도 없이" 국무회의 반발에…눈시울 붉힌 최상목
임영웅 "고심 끝 콘서트 진행"…김장훈·이승철·조용필, 공연 취소
음모설·가짜뉴스, 野 '펌프질'…朴·尹 탄핵 공통·차이점은?
이재명 신년사 "절망의 늪에 빠진 국민 삶…함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