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꾸어야 꿈이다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다. 인간에게 꿈은 삶의 희망이며 원동력이다. 사람은 꿈을 가짐으로써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나는 종종 '스스로를 향해 넌 꿈이 있니?'라고 묻곤 한다.
대학을 간호학과로 선택할 당시 나의 꿈은 나이팅게일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3학년 때 병원실습을 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 당시 내 눈에 비친 간호사의 모습은 의사를 돕는 한낱 보조원에 불과했다. 졸업 후 간호사로서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 일신 기독병원에서 간호 조산원 과정을 수려하고 병원에서 간호 조산원으로 근무했다. 10년간 병원생활을 하면서 참 만족과 보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인생은 한 번 뿐인데 내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영아원이었다. 그곳에서 몸이 아픈 아이들을 돌보면서 고아원 원장이 되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꿈은 꾼다고 다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아원 원장이 되는 꿈을 가지고 대학원에 들어갔으나 공부를 하면서 앞으로 아동복지보다 노인복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인복지로 전공을 바꾸면서 꿈의 방향도 달라졌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복지관에서 치매 노인들을 만남으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지난날의 삶은 단지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이었다. 꿈이 크든 작든, 설령 꿈이 변한다 해도, 꿈은 꾸어야 갖게 되는 법이다.
망미동 오양아파트 뒷담벼락에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그룹홈인 '고향의 집'은 이런 나의 꿈을 배경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 글은 22년 전 부산, 나아가 한국에서 처음 치매 노인 그룹홈을 시작한 나의 이야기이다.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경험한 내 삶의 이야기이다. 적어도 꿈은 내게 삶의 희망이며 원동력이었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길잡이였다.
영아원 봉사로 시작하다
성애원은 0세부터 7세까지 부모가 없는 영아들을 수용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이었다. 처음에는 봉사활동으로 시작했지만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루는 봉사활동을 마치고 나오는데 원장이 나를 보자고 했다. 원장은 "최 선생님, 영아원에 간호사가 꼭 필요한데 월급이 적어 올 사람이 없어요. 매일 오시지 않아도 좋으니 일주일에 며칠이라도 오실 수 없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뜻밖의 제안에 한 번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원장실을 나왔다.
당시 영아원에서 간호사 월급은 35만원이었다. 15일 근무에 100만원을 받고 있었던 나로선 결단을 내리는 것이 쉽진 않았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돈보다 나를 필요한 곳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병원을 그만두고 영아원 간호사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나의 주 업무는 아픈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고 돌보는 일이었다. 평소 때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은 일반가정의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병든 닭처럼 몸이 아파도 짜증을 낼 줄 몰랐다. 짜증을 내도 받아줄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그 고통을 삭이며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가장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병원에 아픈 아이들을 데리고 가다 보니 아이들에게 가정을 경험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원장에게 부탁했다. 원장은 나를 무척 신뢰했다. "원장님, 퇴근할 때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 허락해주세요." 라고 말하자 선뜻 허락해 주었다. 매일 퇴근할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복도에서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매일 세 명의 아이를 데리고 갔다.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실망한 얼굴을 보며 다음에 꼭 데리고 간다는 약속을 했다. 아이들은 바깥세상을 그리워했다. 데려 간 아이들이 처음 경험하는 가정의 따스한 분위기에 무척 행복해했다. 이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고 싶었지만 당시 여건으로 그 꿈은 이루기가 어려웠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영아원 문을 들어서는 순간 모든 걱정과 염려가 사라졌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 당면할 현실들을 생각할 때 내가 지닌 걱정은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는 정성을 기울였지만 그들의 교육적인 면에는 무관심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려면 간호사보다 고아원 원장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영아원에서 3년을 보내며 이왕 아동복지를 하려면 전문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5년 9월 초 시험 준비를 위해 학과 사무실을 찾아가서 조교한테 공부해야 할 책과 입시자료에 대해 도움을 구했다. 조교는 "지금 준비하면 너무 늦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 사람들도 1년은 준비해야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부산대학원의 사회복지학과가 가장 경쟁률이 높았다. 그래도 그 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40대 늦은 나이에 부산대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자 전공을 결정해야 했다. 공부를 하면서 앞으로 아동복지보다 노인복지가 더 요구되는 사회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민 끝에 노인복지로 전공을 바꾸면서 고아원 원장이 되려던 꿈도 접어야 했다.
치매 노인에 눈을 뜨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치매 어르신들을 만났다. 가족들과 상담을 하며 그들의 고충을 알았다. 복지관에는 치매 또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는 가족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2주간 돌봐주는 단기 보호 프로그램이 있었다. 문제는 막상 2주가 끝나고 집으로 모시고 갈 때가 되어도 가족들이 부모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길 원치 않는 것이다. 더 오래 모실 수 있는 시설을 소개해 달라고 간청을 하는 정도였다.
당시 부산에는 치매 노인들을 모시는 시설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가끔 상담하러 가정방문을 가면 치매 노인들이 방안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일하러 갈 경우 밥상을 차려놓고 방문을 잠그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노인이 하루 종일 방안에 갇혀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안에서 갇혀 지내야 하는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고충도 말이 아니었다. 치매 가족들의 고충이 얼마나 힘든가를 내가 상담한 가족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정을 소개하려 한다.
아들과 함께 입소하신 박00 할머니는 진주여고를 나오신 엘리트분이였다.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셔서 결혼식 때는 할머니의 자작시인 '오월의 신부'를 낭독했을 정도였다고 아들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할머니는 한시도 집에 있질 않고 매일 밖으로 나가려는 배회증상이 심했다. 다른 자식 집으로 가자고 해서 모시고 가면 조금 있다 또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해서 가면 거기서도 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매일 반복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들은 사업가였다. 아내한테만 힘든 어머니를 맡겨둘 수 없어 함께 돌보았는데 사업에 지장이 많다고 했다. 더 이상 집에 모시기 힘들어 복지관에 모시려는데 적응하실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참 후에 아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 요즘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업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시골로 들어가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함께 죽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순간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젊은 분이 이런 극단적인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복지관에 입소했고 할머니를 도울 방법들을 여러 가지 시도해 보았으나 할머니는 기관에 적응을 못하시고 며칠 뒤에 퇴소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아들의 그 말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짓눌렀다.
다른 케이스는 아들이 모시고 입소하신 윤00 할머니였다. 아들의 말에 의하면 치매가 오기 전 할머니는 인품 좋고 손자들에게 매우 자상한 분이셨는데 치매가 오면서 성격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할머니에게는 고등학교 3학년인 손녀가 있었다. 과거에 할머니는 손녀딸을 무척 사랑하고 손녀역시 할머니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손녀와 자주 말다툼을 하고 심지어 심한 욕설까지 퍼붓는다고 했다. 문제는 할머니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손녀가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공부는 해서 뭣하느냐, 나도 늙으면 할머니처럼 되지 않으란 법이 있느냐', 라면서 지금 대학 수능을 준비해야 하는데 아예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공부를 하지 않으니 성적도 자꾸 떨어졌다. 선생님으로부터 최근에 딸을 걱정하는 전화를 받았다면서 치매 어머니도 문제지만 지금의 딸이 더 문제라고 하소연을 해왔다.
치매 가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언젠가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면 이분들을 돕는 시설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간호학과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게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이분들을 도와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에서 알고 지내던 분에게서 책 한 권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동경 대 의사가 쓴 『치매예방과 케어』로 마침 치매 노인을 돌보던 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그분은 일본의 불교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졸업 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나를 잊지 않고 귀한 책을 보내준 것이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치자 마치 귀한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대학원에서 노인복지를 전공했지만 사실상 치매 노인에 대해 배운 지식이 거의 없어 실제로 치매 노인을 케어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 책은 치매 노인 케어에 대한 실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일본에서는 치매 노인을 위한 그룹 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룹 홈을 위한 집을 구하다
노인 그룹 홈은 원래 스웨덴의 노인복지 제도를 견학하고 와서 시작된 것으로 일본에서도 아직 그 숫자는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0명 미만의 노인을 상당수 직원이 케어하기 때문에 비용도 시설보다 비싸고 연금 범위 내에서 입소가 가능하기에 앞으로 많은 지역에 설립하는 것이 치매 노인을 위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앞으로 우리나라도 노인 그룹 홈이 반드시 필요하고 노인 그룹 홈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하려면 우선 큰 집이 필요했다. 당시 2,500만원 전세 집에 살고 있던 내 형편으로 큰 집을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나는 그 꿈을 접을 수가 없었다. 매일 나는 벼룩 신문에서 집을 찾는 것이 하루일과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어느 날 신문에서 우리가 찾던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지 74평, 건평 66평의 가격은 일억 육천오백이었다. 돈보다 우선 집이 우리가 원하던 집인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신문에 빨간 싸인 펜으로 표시해둔 그 집을 찾아갔다.
집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이 집이 우리가 찾던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빨간 영산홍을 비롯해 각종 나무들로 잘 가꾸어진 2층 주택이었다. 주인을 만나서 집을 보러 왔다고 하자 대뜸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했다. 애써 표정을 감추고 "얼마면 이 집을 살 수 있습니까?"라고 되묻자 주인은 집이 커서 그런지 내놓은 지 오래 되었어도 팔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꼭 사겠다면 조금 더 깎아주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집을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어디서 돈을 빌릴 수 있을까?' '누가 나에게 돈을 빌려줄까?' 머릿속이 한참 복잡했다. 여태껏 한 번도 돈을 빌려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지인들 중에 돈을 빌릴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노트에 적었다. 평소에 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것은 아닌가?'란 자괴감이 밀려왔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한참을 울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나는 결혼을 앞둔 여동생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간절한 말로 부탁했다. 동생은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돈을 선뜻 내주었다.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계약금을 치르고 중도금 날자는 15일 뒤로 잡았지만 부동산 사무실을 나서는 마음은 무거웠다. 생각 끝에 우리가 살던 주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주인이 다행히 전세금을 미리 돌려주는 바람에 가까스로 중도금을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잔금이었다. 1억이 넘는 큰돈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요즘은 1억이 크게 생각되지 않지만 그 당시 대학원을 졸업한 내가 사회복지사로서 받던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월급을 받을 때마다 '사회복지사는 돈보다 보람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사실 이 돈은 내가 받는 월급으로는 평생을 모아도 모을 수 없는 큰 액수였다. 잔금 날이 다가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다 못한 남편이 집 주인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다. "저는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이고 솔직히 돈이 없는데 집사람이 노인들을 위해서 이 집을 사려고 합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이 집을 담보로 돈을 은행에서 빌릴 수 있도록 해주시면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완강하게 안 된다고 하셨다.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이 "어머니, 목사님이 좋은 일을 하려는데 우리가 좀 도와 줍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다시 생각해보고 내일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딸한테서 "엄마가 그렇게 해주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우리가 원했던 큰 저택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그룹 홈의 신고와 홍보
막상 집을 구입했으나 그룹 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내가 아는 지식은 고작 책을 통해 일본에서 그룹 홈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그룹 홈이 어떻게 운영되며, 시설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막막했다. 여기저기 아는 지인들로부터 은평구에서 그룹 홈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서울로 향했다. 이곳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노인 그룹 홈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큰 건물의 한 층을 빌려서 운영하고 있었다. 실망하고 내려와서 찾고 있던 중 어떤 분이 대구에 내과의사가 자신의 별장에서 그룹 홈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당장 대구로 갔다. 그러나 그 시설도 규모가 커서 그룹 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사회복지사의 말에 의하면 한 달 입원비가 150만원인데 대기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시설은 돈이 있는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나름대로 설계도를 그렸다. 가능한 기존 집을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 2층엔 우리가 살고 1층에 노인이 생활할 수 있는 입원실, 넓은 거실 겸 프로그램실, 목욕실, 의무실, 주방, 화장실 2개를 만들었다. 2000년 5월 25일 드디어 치매 노인을 위한 노인 그룹 홈 '고향의 집'을 열게 되었다.
시설을 만들고 나서 수영구청노인 복지과에 시설 신고를 했다. 그런데 노인 복지과 담당자의 "노인 그룹 홈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라는 전화를 받고 난감했다. 그룹 홈에 대해 설명을 하자 '노인 그룹 홈'이란 말이 노인 복지법에 없기 때문에 신고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렵게 시설을 만들었는데 신고를 할 수 없다는 말에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나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일은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고 용기가 생겼다.
치매 노인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 노인복지법에 노인 그룹 홈이란 용어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을까 생각하다 부산대학에 계시는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이야기했다. 교수님은 "'우리 나라는 항상 민간이 먼저 복지를 시작하고 수요가 많아지면 나라에서 법을 정하므로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시면서 "혹시 시청에 아는 분이 있으면 부탁을 해 보든지 아니면 매스컴에다 글을 써서 필요성을 계속 알리는 방법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매스컴에 글을 올리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려 빠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시청에 마침 아는 분이 있어 사정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구청에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말을 들으니 약간 안심이 되었다. 며칠 뒤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처음에 내게 했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시설을 하되 사고가 나면 자신이 책임져야 하므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하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담당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닫혔던 문이 의외로 쉽게 열려 정말 감사했다.
문을 연다고 해서 노인들이 알고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노인 그룹 홈에 대해 알려야 하는데 신문에다 홍보를 하려고 문의해 본 결과 돈이 많이 들었다. '노인 그룹 홈 고향의 집' 이라고 한 번 내는데 상당한 금액이었다. 홍보가 중요한 것은 알지만 돈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우연히 시청 공보과에 아는 분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분은 내일 당장 고향의 집에 대한 글과 사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시보는 중요한 기관에는 다 들어가기 때문에 광고 효과가 크다는 말도 해주었다. 그 말은 곧 사실로 나타났다.
시보에 그룹 홈이 소개되고 난 다음 날 조선일보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향의 집'을 취재하고 싶은데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느냐는 문의였다. 정말 뜻밖의 행운이었다. 조선일보 한 면에 '치매도 노인 그룹 홈에서 돌보면 치료효과가 크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가자 다음에는 KBS 1 TV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오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기적같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홍보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매스컴을 통한 홍보 효과는 놀라웠다. 심지어 싱가포르에 있는 분으로부터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는데 노인 그룹 홈에 모시고 싶다는 상담문의가 들어올 정도였다.
2006년 3월 시청에 아는 분으로부터 로또 복권기금으로 복지시설에 시설개보수 지원을 해주니 신청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노인시설 및 장애인 시설은 이용자들을 위해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경사로가 필수조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재정난으로 아직 경사로를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이번 기회에 경사로와 1층을 노인시설에 맞게 보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략 견적을 내 본 결과 4,500만원이 들었다. 500만원은 시설이 부담하기로 하고 4,000만원을 신청했다. 경험이 없었던 우리는 일체를 그분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공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관급공사가 부실공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어르신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이윤만을 목적으로 날림공사를 한 것을 보고 속이 상했다. 그러나 관급공사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는 비리의 실상을 몰랐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 문제가 점차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자 정부에서 2007년 5월 장기요양시범사업을 실시했다. 그리고 2008년 7월에 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되었다. 보호가 필요한 노인들과 가족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동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는 가족들의 부담이 덜게 되었다. 요양비의 80%를 장기요양보험에서 지급하므로 가족들이 안심하고 노인을 시설에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시범사업을 하는 기간에 의료보험공단의 관계자들이 '고향의 집'을 방문했다. 나는 앞으로 그룹 홈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이 노인복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들은 노인들을 위해서 그룹 홈이 이상적인 장소라는데 공감하고 돌아갔다. 장기 요양보험제도가 생기고 나서 전국에 그룹 홈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이 큰 시설 위주로 나가는 바람에 소규모 시설인 그룹 홈은 운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시설이 문을 닫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선진국의 노인복지가 그룹 홈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노인복지는 요양병원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비극적인 현실이다. 노인에게 오는 병은 대부분이 노화로 인한 질병이다. 병원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공간이 아니다. 병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병이 나으면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 노인병의 대부분은 치료를 해서 낫는 병이 아니다. 노인 복지를 공부한 나로서는 요양원이나 그룹 홈에서 따듯한 인간적인 돌봄이 어르신들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방암과 싸우면서
2017년 1월 7일은 나에게 잊지 못할 날이다. 우연히 가슴 밑에 불편한 느낌이 있어 만져보니 제법 큰 몽우리가 있었다. 작년 10월에 건강 검진 시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어 다음 날 유방 전문병원을 찾았다. 초음파와 유방촬영 결과 조직 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직 검사 결과 유방암 3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유방암 3기면 항암 치료를 8차례 해야 하는데 먼저 6차를 하고 종양을 줄인 후에 수술을 하자고 했다. 의사의 말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나라고 암에 걸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것은 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내 몸에 생긴 암을 받아들이자.'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 날 병원에 입원을 하고 1차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항암주사를 맞고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머리를 감는데 머리카락이 한 줌씩 빠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생각다 못해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다 밀어 버렸다. 머리가 없다는 것은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통과해야만 하는 첫 번째 문이었다. 대신 가발을 한 개 맞추고 인터넷으로 모자도 3개 샀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항암을 하고 나서였다. 주사 후 다음 날부터 입맛이 싹 사라지는 것이었다. 먹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 인간은 먹기 위해서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먹는 것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다 먹고 싶은 것이 생각나서 막상 먹으면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주로 누룽지를 삶아 된장국과 함께 먹었다. 옛날에 엄마가 해준 갖가지 음식이 생각났다. 먹는 것이 부실하니 기운이 없어 누울 자리만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좀 더 오래 함께 있기 위해서 잘 먹어야 이 힘든 치료를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억지로 먹었다. 그 결과 힘든 항암치료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런 힘든 가운데도 여전히 일을 계속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운동도 하고 플롯도 배우러 갔다. 암과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항암치료 횟수가 증가할수록 힘이 들어 플롯은 그만 두어야 했다. 어르신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도 견디기 힘들었다. 주위에 시설을 하는 분들 중에 암으로 투병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은 아예 시설을 떠나 전원적인 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관리했다. 치매 어르신들을 돌보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치매 어르신들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6차례 힘든 항암치료를 마치고 수술은 서울 아산병원에서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서울이 부산보다 의료진이 좋다는 주위 분들의 권유에 못 이겨 서울로 가게 되었다. 부산에 담당 의사는 3기는 무조건 유방을 전부 절제하는 전 절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산병원 의사는 부분 절제가 가능하다고 해서 부분 절제를 하기로 했다. 여자에게 유방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에 유방 한쪽을 다 절제하고 나면 정신적으로 무척 충격이 클 것 같았다. 부분 절제도 가능하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아산병원에서 좌측 유방 부분 절제 수술을 하기 위해 하루 전날 입원을 했다. 내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양측 유방을 모두 절제하신 분이 계셨는데 유방을 다 절제하고 나서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수술을 하는 분이 어쩌면 그렇게 태연하실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내가 믿는 신앙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분은 자신은 가톨릭 신자인데 수술 전날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지금도 종종 우울할 때가 많은데 내가 부럽다는 말을 했다.
5월 23일 오전 8시 수술을 위해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산병원은 수술 환자들이 많아서 3층 전체가 수술실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마음이 너무 평안했다. 수술대에 올라가자 마취 간호사가 팔과 어깨와 옆구리에 패치를 붙였다. 다음에 마취과 의사가 비스라는 센스를 붙이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마취상태로 들어갔다. 깨어보니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회복실에서 30분 정도 누워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 입안이 계속 말라서 가제에 물을 적셔 입에 물고 있었다. 6시간 후에 물을 먹을 수 있어 감사했다. 저녁에 의사가 회진을 왔다. 수술은 잘 되었고 임파절을 제거해서 그 결과를 보고 얘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이틀 후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암의 크기가 1.8cm이고 림프절 6개를 떼어 조직검사를 한 결과 3개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추후 항암치료 여부에 대해서는 1주일 뒤에 알려준다고 했다.
원래 6번 항암치료를 하고 수술을 한 후 2번 항암치료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주일 뒤 더 이상 항암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너무 기뻤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고 방사선 치료를 또 받아야 했다. 방사선은 부산에 원자력 병원에서 하기로 했다. 가슴 부위에 방사선을 쪼이는 것인데 항암에 비하면 방사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7월과 8월 무더운 날씨에 약 2개월 동안 샤워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 8월 18일 드디어 34번의 긴 방사선치료를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계속 정기 검진을 받으러 6개월에 한 번 아산병원으로 가야했다.
2020년 12월 정기 검진 결과 림프절에 전이가 생긴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약도 먹고 정기검진도 받았는데 9월 정기 검진 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셨는데 불과 석 달 만에 전이가 되었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에게 "9월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셨는데 불과 석 달 사이에 전이가 되었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됩니다." 라고 원망스런 어조로 말했다. 나의 질문에 의사는 "암세포가 어느 정도 자라야 알 수 있고 그 전에는 발견하기가 어렵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곧 이어 "입원해서 림프절을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 한편에서는 그동안 쌓아왔던 의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었다. 암이 또 재발한 것을 의사한테 불평해 본들 무슨 유익이 있으랴, 의사도 사람인 것을, 다만 항암치료를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했다. 외래에서 수술할 날을 잡고 수술을 한 뒤 부산에 있는 원자력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35회 받았다.
2022년 1월7일 드디어 만 5년이 지났다. 암 환자들은 5년을 넘기면 대체로 안심해도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유방암은 다른 암에 비해 재발율이 높다. 발병한지 10년이 지나 재발하는 분도 20년이 지나서 재발하여 치료를 받는 분도 만나 보았다. 암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암 환자의 고통을 알 수 없다. 암을 겪어 보았기에 암 환자 곁에 선뜻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 의하면 암은 치매보다 훨씬 고상한 병이다. 누가 나에게 암과 치매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암을 택할 것이다.
치매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병이다. 복지관에 근무할 때 치매가 심한 할아버지가 기억난다. 그 분은 공무원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정년퇴임 후에 치매가 왔다. 할아버지는 아침에 복지관에 들어오시면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 00씨, 안녕하십니까?"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치매가 심해지면 자신의 모습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추억도 가족의 얼굴도 잊어버린다. 종종 뉴스에 치매노인을 돌보고 있던 가족이 동반 자살을 택하는 경우를 보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이 간다. 어떤 경우에도 극단적 선택은 잘못된 것이지만 치매는 가정을 파괴하는 '가정파괴범'라는 말처럼 치매는 가정도 파괴할 뿐 아니라 자신도 파괴하는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이다.
그룹 홈 가족과 더불어
신문에 그룹 홈이 소개되고 다음 날 신문을 들고 처음으로 '고향의 집'을 찾아온 치매 가족이 있었다. 할머니는 고향이 울진인 분이셨다. 그 당시는 여자들이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을 시켰다. 15살에 시집을 가서 아들을 둘 낳고 17세에 남편이 징용에 끌려간 후 소식이 없었다. 할머니는 혼자 아들 둘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고 했다. 주위에서 아이들을 두고 다시 시집을 가라고도 했지만 차마 아이들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밤에도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일을 했다. 그 덕분에 아들 둘은 잘 자라 결혼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이 도시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울진에서 혼자 살고 계셨는데 어느 날부터 치매가 온 것이다. 큰 아들이 부산으로 모시고 와서 3년을 어머니와 한 방을 쓰면서 어머니를 돌보았다. 아들은 더 이상 집에서 모실 수가 없어 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말했다.
병원에 모셔놓고 한 번씩 면회를 갈 때마다 어머니가 계속 주무시고 계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소할 당시는 걸어서 가셨는데 지금은 걷지도 못하시고 침대에 누워만 계셨다. 병원 관계자에게 "어머니가 올 때마다 왜 잠을 자느냐"고 항의하자 치매가 심해서 더 이상 여기서 모실 수 가 없으니 모시고 가달라는 말을 했다. 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는 문제의 인물이라고 했다. 화장실에 가시면 휴지통에 든 쓰레기를 다 들고 나오시고, 신발장에 신발을 몽땅 들고 나오시고, 눈에 보이는 것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젊을 때 일을 많이 하신 할머니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일로 보였다. 잠을 재우는 방법 외 다른 방법이 없다는 직원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우리를 기르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다 희생했는데 자신은 3년밖에 모시지 못한 것을 가슴아파했다. 병원에 모시면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어머니의 상태를 보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이런 상태인 어머니를 모시고 오면 받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저도 선생님을 도와드리고 싶지만 솔직히 장담을 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에서 모시고 가라고 하니 일단 모시고 오시면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 아들이 병원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할머니의 모습은 초점을 잃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무서웠다. 오랫동안 식사를 못하신 탓에 기력이 없어 걸음도 잘 걷지 못했다. 더 기가 찬 것은 식사하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죽을 떠 먹여 드리자 삼키는 것을 잊었는지 입에 물고 계셨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상태가 좋아졌다. 식사를 잘 하시면서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기력이 회복되면서 병원에서 하시던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낮에는 직원들이 많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밤만 되면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일을 하시는 것이었다. 방안에 있는 것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없었다. 밤새 이불깃을 다 뜯어 놓으시고, 커튼도, 심지어 전기 스위치까지 뜯어내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내가 할머니 옆에서 밤새 보초를 서야 했다. 아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할머니를 케어했다. 할머니는 노래도 잘 부르시고 성격도 매우 화통한 분이셨다. 1년 정도 지나자 할머니의 상태가 차츰 회복되었다. 밤에 잠도 잘 주무시고 문제 행동도 많이 줄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집에서 모시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어머니가 만일 돌아가시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나도 마음이 기뻤다. 할머니가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지금부터 고향의 집에서 모신 치매 어르신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어르신 몇 분을 더 소개하려고 한다. 할머니는 성함이 이 00이었다. 충청도가 고향인 분으로 성품이 매우 온화하셨다. 며느리가 일찍 죽는 바람에 손자를 6학년 때부터 키웠다고 했다. 손자는 잘 자라서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손자며느리는 할머니를 모시는 것을 싫어했다. 손자와 둘이서 행복하게 살다가 손자며느리가 들어오면서 할머니에게 불행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생각다 못해 집을 나와 혼자 외롭게 살았다.
이일로 인한 충격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에게 서서히 치매 증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할머니는 조금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시고 "XX년, 못된 년, 너희 집에 가라."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하셨다. 지남력 장애도 심해 자신의 방과 화장실도 분별하지 못했다. 치매증상이 심해지자 딸이 어머니를 모시고 입소했다. 할머니는 시골 분이라 부지런하셨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시면 마루를 닦고 계셨다. "할머니, 절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서 나물거리, 마늘 까기, 그릇 닦기 등 허드렛일을 드리면 무척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나를 동상이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할머니가 시설에 계시는 동안 손자가 몇 번 다녀갔다. 그런데 아들은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딸의 말에 의하면 아들이 사업을 하느라 늘 바쁘다고 했다.
나이 탓인지 차츰 치매도 심해지고 몸도 쇠약해지셨다. 감기가 오면서 합병증으로 폐렴이 왔다. 가래도 많이 차고 호흡도 곤란했다.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흡인기로 가래를 수시로 뽑았으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밤중에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다가 딸에게 전화를 했더니 곧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한테도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아들의 말이 뜻밖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병원으로 모셔놓고 전화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화가 치밀었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연락을 하면 만사를 다 제쳐놓고 달려오는데, '아무리 사업이 바쁘기로 이렇게 무정할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후에 딸이 왔다. '엄마' 하며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딸이 병원에서 보낸 앰뷸런스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다음 날 장례식장에 간 나는 깜짝 놀랐다. 할머니의 영정을 모신 방 앞에 수많은 화환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구나.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이 너무 서글퍼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김 00 할머니는 고향이 함경도 함흥인 분이였다. 아들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신 부잣집 무남독녀였다. 그 당시 집에서 승마도 하고 영어 가정교사도 둘 정도로 부유하게 자랐다. 그런데 딸이 고등학교 때 영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한테 가정교사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가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딸은 홧김에 집안에 있는 빙초산을 마시고 기절해버렸다. 아버지가 딸을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빙초산이 넘어가면서 목 안에 심한 손상을 입혔다.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 후 딸은 음식물을 삼키는데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딸의 소원대로 결혼을 허락했으나 결국 얼마 못살고 아들 하나를 두고 남편과 이혼하고 말았다.
할머니는 며느리가 모시고 입소한 경우였다. 며느리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고집이 세고 성질이 너무 괴팍해서 아파트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부잣집 무남독녀로 자란 탓인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으면 아파트 한가운데 드러누워서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창피해서 요구를 들어드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동안 너무 자신을 힘들게 했기 때문에 앞으로 면회는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해도 다시는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정말로 그날 이후 나는 며느리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한 번도 할머니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효자였다. 외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카스텔라를 사가지고 와서 먹여 드렸다. 할머니는 치매가 심했다. 늘 하는 말이 자기는 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직원들한테도 자기한테 잘못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다. 할머니와 친해지는 방법을 생각했다. 할머니는 그 당시에 고등학교를 나오신 분이라 일본어를 곧 잘하셨다. 생각해 낸 것이 할머니와 일본어 책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 방법은 적중했다. 일본어 책을 펴 놓고 할머니에게 일본어로 물으면 할머니가 일본어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역할에 만족해하시며 열심히 참여하셨다. 함께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문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밤이 문제였다. 밤만 되면 섬망증상이 심했다. 매일 밤중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셔서 창문을 내다보며 "저기 할아버지가 와 있다, 얼른 나가서 문을 열어줘야 한다."고 하시며 "내 말 안 들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경찰을 부르겠다."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할머니의 또 다른 증상은 밤마다 혼자 독백을 하시는 것이었다. 처음에 밖에서 소리를 듣고 '이상하다 이 밤에 누가 왔지, 아들이 왔나.' 라는 생각이 들어 방문을 열어 보면 할머니가 혼자서 모노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밤마다 저렇게 하실까라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함흥 분이셔서 함흥냉면을 무척 좋아하셨다. 할머니가 종종 함흥냉면 이야기를 하셔서 하루는 할머니를 함흥냉면집으로 모시고 갔다. 할머니가 냉면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치매가 심해지면서 삼키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음식을 차려주면 입속에 넣고 오래 동안 씹어서 물만 조금 삼키고 건더기는 상에다 도로 뱉어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너무 안타까웠다. 하루는 할머니 방에 들어가자 대변 냄새가 심하게 났다. 아무리 뒤져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할머니 방을 대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누워있는 매트를 들어 올리자 동전 크기의 새까만 고체들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할머니의 변인 것을 알아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공 00 어르신은 창녕이 고향인 분이셨다. 할머니는 슬하에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남편이 죽고 막내딸이 엄마하고 오래 같이 살아서 결혼하고 엄마를 모시고 있었는데 치매가 왔다. 입소할 당시 딸은 엄마를 위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큼직한 글씨로 A4 용지에 프린트를 해서 가지고 왔다. 딸은 엄마가 노래를 좋아하니 매일 노래를 함께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딸의 효심에 감동되어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할머니는 노래를 잘 불렀다. 가사와 곡조도 정확했다. 할머니가 특히 좋아한 노래가 있었는데 '정'이라는 오래였다. 가사 중에 '정 정 정주고 가네, 정주고 간사람, 정 정 정말로 미워 정말 미워라,' 라는 대목이 기억이 난다. 정든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잘 표현한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딸은 자주 어머니를 찾아와서 노래를 불러 주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도 만들어 왔다. 할머니는 배회가 심하고 사람과 사물에 대한 인지능력이 거의 없었다. 거실에 다니시면서 화분의 꽃이나 나뭇잎을 마구 꺾으셨다. 옆에서 보고 있던 분이 못하게 하면 화를 내셨다.
할머니 가족과 관련하여 좋은 추억이 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할머니의 친척들이 형제는 물론 사촌들과 손자 및 갓 난 아기인 증손까지 대략 15명 정도의 손님들로 거실을 가득 메웠다. 지금까지 다른 가족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것을 통해 할머니가 치매가 오기 전에는 가족들에게 인정받았던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치매가 더 심해지고 침대에 누워서 지내시게 되자 가족들의 발걸음도 차차 멀어졌다. 그렇게 극성이던 딸도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를 지켜보면서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도 잊혀 진 존재가 되는 것이 치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에서 배우는 인생 교실
일본 노인들의 첫 번째 소원은 아무도 모르는 차가운 병실에서 죽기 싫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떠나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1997년 일본의 노인병원을 방문해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의 노인병원은 지금 한국의 요양병원과 흡사했다. 그러나 일본은 국가의 많은 재정을 들여 선진국의 노인복지를 연구하고 노인들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노인 복지는 어떠한가? 노인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노인복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노인 요양병원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노인복지의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복지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복지다. 나이를 먹고 장애가 있어도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내 나이도 곧 일흔을 앞두고 있다. 10년 뒤에 나는 과연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가끔 생각하게 된다. 노인이 되어 치료할 질병이 있으면 마땅히 병원에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가능하다면 요양원이나 노인 그룹 홈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노인복지가 발달한 유럽 선진국에서는 그룹 홈이 발달되어 있다. 혼자 사용할 수 있는 1인실은 물론 부부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설도 선택할 수 있다. 우리 나라도 요양병원 중심의 노인수용시설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야 한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는 노년기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고 인생을 통합하는 시기를 어디서 누구와 보내는가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다.
고향의 집에서 치매 어르신들과 한 가족으로 산지도 20년이 넘었다. 딸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를 두고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치매 가족들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되었다. 치매 노인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므로 고통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밤마다 치매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외마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질병 중에 가장 비참한 병이 치매라는 사실을 치매 노인을 모시면서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나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고향의 집에서 그분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 인생에서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 나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 꿈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타인을 위한 꿈인 경우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나는 경험하게 되었다. 원치 않은 질병으로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어르신들이 고향의 집에서 가족처럼 화목하고 편안하게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면 나의 꿈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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