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나영석 PD의 예능에는 '표'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나영석표 예능. 여행이 있고 먹방과 쿡방이 있으며 정서적인 편안함이나 즐거움까지 주는 예능. 그런데 그가 새로 가져온 '뿅뿅 지구오락실'은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 익숙함과 새로움은 뭘까.
◆'신서유기'의 색다른 여자 버전
나영석 PD가 돌아왔다. 사실 돌아왔다는 표현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는 떠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늘 해왔던 여행 예능에 어떤 장애물이 생긴 건 분명했다. 그래서 '삼시세끼' 어촌편도 아예 무인도인 죽굴도로 들어가서 한 바 있고, '윤스테이'도 한정된 공간에서 코로나 진단 검사를 사전에 받은 외국인들만을 초청해 방송을 했다. 대신 나영석 PD는 유튜브와 연계한 숏폼 콘텐츠들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출장 십오야', '송민호의 파일럿', '악마는 정남이를 입는다', '마포 멋쟁이', '나홀로 이식당' 등등. 그러니 돌아왔다고 말하는 건 어딘가 맞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돌아왔다고 말하게 된 건, 엔데믹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이제 여행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영석 PD가 새로 시작한 '뿅뿅 지구오락실'이 다시 재개된 해외여행 소재를 담았기 때문이다. '뿅뿅 지구오락실.' 제목만 보면 어딘가 옛 감성과 B급감성이 더해진 느낌이지만, 그 기획의도를 들어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스케일의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게 실감난다. 즉, 지구 전체를 하나의 '오락실' 삼아 어디든 훅 날아가 게임을 즐기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시간을 과거로 되돌린 듯한 옛 감성을 넣은 것도 그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은 90년대니 2천년대니 하는 시간대를 가진 또 다른 평행우주로의 여행을 가상 설정으로 삼았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그저 싸 보이는 비키니 옷장이지만 그걸 하나의 타임머신 삼아 과거의 시간대로의 여행을 한다는 콘셉트를 세계관으로 삼은 것.
물론 이러한 설정은 '신서유기'와 그리 다르지 않다. 드래곤볼이 떨어진 곳으로 가서 볼을 쟁취하기 위한 게임을 하는 것인데, 그 공간을 해외로 삼았던 것이 애초 '신서유기'의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신서유기'의 여자 버전처럼 보이는 설정이지만, 놀랍게도 '뿅뿅 지구오락실'은 확실히 다른 프로그램처럼 느껴진다. 바로 출연자들 덕분이다. 개그우먼 이은지, 오마이걸 미미, 래퍼 이영지 그리고 아이브 안유진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 출연자들이 프로그램의 색깔을 확실히 차별되게 만들어냈다는 건, '뽕뿅 지구오락실' 첫 회 이들의 사전미팅 장면에서부터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등장부터 역대급 텐션을 보여주며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멘트들은 거의 오디오의 빈구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워낙 텐션이 높아 등장부터 '괄괄이'라는 캐릭터를 갖게 된 이영지야 이미 알고 있던 에너지였지만, 그런 텐션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척척 죽이 맞는 이은지와 미미가 합세하니 제작진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일부러 차분한 캐릭터로 섭외했던 안유진마저 그 텐션에 합류하자 나영석 PD는 "내가 이런 느낌으로 섭외한 거 아니었단 말이야" 라며 볼멘소리를 털어 놓을 정도였다.
◆여성 예능의 새로운 재미
사실 '뿅뿅 지구오락실'이 섭외한 출연자들은 유튜브가 익숙하다. 채널 십오야로 유튜브의 세계에 일찌감치 입성한 나영석 PD는 그래서 이번 섭외에 있어 유튜브 특유의 텐션과 감성을 가진 이들을 눈여겨 본 듯하다. 이은지는 '은지랑TV'로 또 '피식대학'의 길은지로 핫하디 핫한 개그우먼이고, 미미는 '밈TV'로 브이로그부터 먹방까지 선보이는 아이돌이자 유튜버다. 이영지는 '이영지'라는 채널을 운영하며 래퍼로서의 음악은 물론이고 특유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일상의 브이로그로 예능계가 주목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지상파나 케이블 같은 기성 미디어의 예능 문법보다는 SNS를 통한 새로운 재미요소들에 더 익숙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은 유튜브는 하지 않지만 팔로워 270만을 보유한 인플루언서인 안유진도 크게 다르진 않다. 즉, MZ세대 특유의 감성이 다르고, 이들이 접하고 있는 미디어가 다르며, 그래서 이 출연자 구성만으로도 전혀 다른 재미요소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은 나영석 PD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나영석 PD가 주로 게임을 통해 출연자들과 만들어내는 재미는 이른바 '방송국 놈들'이라고 흔히 부르는 그 위계에서 만들어지곤 했었던 게 사실이다.
'1박2일' 시절 출연자들만큼 나영석 PD가 인기를 끌었던 건 복불복 게임 후 가차 없이 "땡!"하고 외치며 쾌재를 부르는 투철한 직업정신(?)이 캐릭터로 등장해서였다. 출연자들이 괴로울수록 즐거워지는 시청자들에게 나영석 PD는 이를 대리해주는 인물로 떠올랐던 것.
하지만 '뿅뿅 지구오락실'에서는 이런 관계가 역전된다. MZ세대들로 구성된 여성 출연자들은 나영석 PD가 하는 멘트들이 올드하다고 '옛날사람'으로 지적받기도 하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낙오 같은 '익스트림 미션'이 어려운 '노화된' 인물로 치부된다.
이런 점들은 게임에서도 나타난다. 칼 같이 "땡"하고 외치던 그 목소리는 이 젊은 MZ세대들의 팽팽 돌아가는 순간 판단력에 의해 스스로도 흔들린다. '날'이 들어가는 단어를 줄줄이 말하는 게임에서 '좋은 날'에 가차 없이 땡을 외친 나영석 PD가 "아이유의 좋은 날"이라고 영지가 말하자 뒤늦게 깨달은 듯 이를 수긍하며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 그렇다.
텐션이 '저세상'급인 젊은 출연자들, 게다가 그간 나영석 PD가 줄곧 함께 해왔던 남성들 대신 여성들로 꾸려진 이 출연자들은 그 구성만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방송국 놈들'을 오히려 당황시키는 관계의 역전이 주는 쾌감 또한 자리해 있다. 시청자들의 호응이 이어지는 이유다.
◆나영석 사단의 새로운 세계
'신서유기'에서 '뿅뿅 지구오락실'로의 변화와 그에 대한 호응이 그간 하나의 예능 세계를 구축해온 나영석 사단에 말해주는 건 뭘까. 그건 이미 나영석 PD가 채널 십오야를 하면서 유튜브 예능을 만들고, 숏폼을 실험하며 저만치 새로운 예능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걸 감지했던 것처럼, 이제 본격적인 예능의 신세계가 열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남성 출연자 중심으로, 또 제작진이 갑으로서 출연자들을 쥐락펴락하던 방식으로, 또 기성 미디어들의 주 시청층이었던 중장년 세대에 주로 맞춰진 소재와 출연자들에서 이제 여성 출연자들도 중심에 서고, 출연자들이 오히려 제작진을 압도해 나가며 무엇보다 젊은 세대들의 감성에 맞춰진 예능의 맛을 '뿅뿅 지구오락실'은 의도치 않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나영석 사단은 '뜻밖의 여정' 같은 묵직한 기획들도 수행해내지만, 이제 '신서유기'나 '뿅뿅 지구오락실' 같은 예능 본연의 '작정하고 웃기는' 프로그램들도 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건 나영석 PD나 신효정 PD, 그리고 이우정 작가 같은 어쩌면 기성세대가 되어 있는 제작진들이 일찍부터 그 사단으로 끌어안았던 박현용 PD나 이진주 PD 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이제 좀 더 그들 감성을 드러낼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기성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그 중심축이 서서히 이행되는 이 시기에, 양측의 미디어를 섭렵하는 예능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영석 사단은 이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 그래서 '뿅뿅 지구오락실'에서 엿보이는 '옛날 사람들'로서의 제작진들과 '젊은 출연자들'이 묘하게 어울리게 공존하는 모습에는 나영석 사단이 앞으로 열어나갈 예능의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 같은 느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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