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의 명화 ‘명장면 명대사’] (1)아메리칸 뷰티(1999)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의 첫 번째 날”

영화 속 명대사는 시대를 넘는 울림이 있다. 지극한 사랑이 있고, 삶의 위로가 되고, 때론 용기를 준다. 그 영화가 추억의 명화라면 켜켜이 쌓인 관객의 세월 또한 더해지니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추억의 명화 속 다시 보고픈 명장면과 함께, 명대사의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 <편집자 주>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1999)

감독: 샘 멘데스

출연: 케빈 스페이시, 아네트 베닝

레스터 번햄(케빈 스페이시 분)은 무기력 속에 살아가는 중년 남성이다. 부동산 소개업자인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은 물질만능의 속물이 되었고, 반항적인 10대 외동딸 제인(도라 버치)은 아빠가 사라져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어느 날 딸의 학교에 갔다가 되바라진 딸의 친구 안젤라(메나 수바리)를 보는 순간 욕정이 살아난다. 회사를 때려치우면서 상사를 협박해 목돈을 받아내 스포츠카를 사고,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하면서 이미 사라진 자신의 열정과 자유를 맛본다.

영화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한 장면.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다.'

오래 전 어느 병동 침대에 걸려 있던 글귀다. 순간 무심히 보내던 나의 하루가 어떤 거대한 생명 순환의 하루로 느껴졌다.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이토록 간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의 첫 번째 날'(Today is the fi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이라는 '아메리칸 뷰티'의 대사 또한 그랬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굴러 가는 하루들. 그러나 그 하루는 늘 새롭고, 더 큰 여생의 시작점인 것이다. 첫날에는 모름지기 큰 의미가 담겨진다. 옷을 여미는 경건함과 묘한 흥분, 그리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오늘을 첫날로 부르는 순간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처럼 그 하루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될 수 있다.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다. 고급스러운 붉은 장미와 푸른 눈의 금발 미녀를 '미국식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붉은 장미로 가득한 방에 여성이 나신으로 누워 있는 장면이 바로 영화의 제목이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실제가 아니다. 주인공이 상상하는 것이다. 결국 이 남자는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다.

미국 중산층의 40대 가장 레스터는 벼랑 끝에 내몰린다. 아내는 바람이 나고, 딸은 "누가 아빠를 죽여줬으면 좋겠다"며 자신을 증오한다. 회사도 사악한 인간들이 득실댄다. 새파란 젊은 매니저가 호시탐탐 그를 해고하려고 한다.

한때 아내는 사랑스러운 숙녀였으며,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천사였다. 회사는 나의 삶을 지탱하는 샘물 같은 존재였다.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한때 찬란했던 나의 꿈은 사라지고, 이제 쓰디 쓴 잔만 남았다.

'아메리칸 뷰티'는 역설적인 스토리로 미국 중산층의 몰락과 비애를 그리고 있다. 마치 이성복 시인의 시 '그날'의 시구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와 같다. 깔끔한 정원이 있는 교외 마을에 살고 있는 가족은 모두가 병이 들었다. 이 가족뿐만이 아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예비역 대령 집은 더욱 병적이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의 위세에 눌려 아들은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았고, 아내 또한 삶의 끈을 놓은 듯 망연자실해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속으로 곪아터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허무한 삶의 편린을 아픈 유머와 상징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위행위로 하루를 시작하고, 사춘기 소년처럼 딸의 친구에게 눈이 먼 아빠의 에피소드는 벼랑 끝에 매달린 한 남자의 슬픔을 능청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장미와 소녀, 일상은 있지만 정작 아름다움이 빠진 것이 바로 '미국식 아름다움'의 허상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겉만 아름다운 속물의 표상이라고 말한다.

영화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한 장면.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꺼내 놓은 것이 바로 비닐봉지이다. 예비역 대령 집 아들 릭키는 캠코더의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빠가 죽기를 바라는 딸 제인에게 그가 찍은 영상을 보여준다.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비닐봉지다. 바짝 마른 낙엽 위를 무심하게 떠다닌다. 바닥에 앉으려다 다시 바람에 일어서고,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릭키가 제인에게 얘기한다. "그날은 마치 첫눈이 내릴 듯 했어. 공중엔 자력이 넘실댔고 춤추는 소리가 들렸어. 저 봉지는 나랑 춤을 추고 있었어. 같이 놀자 떼쓰는 아이처럼. 무려 15분이나 그랬어. 그날 난 느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신비롭도록 자비로운 힘을. 내게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깨우쳐 줬지.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해. 이 세상에는 말이야. 그걸 느끼면 견디기 힘들어. 내 마음이 미어질 것 같거든."

비닐봉지 비디오 영상은 '아메리칸 뷰티'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하는 주제이며 명장면이다. 무심한 비닐봉지의 움직임에서 지구 위에 드리워진 위대한 자장(磁場)까지 느끼게 한다. 심미적 관점만이 아니다. 소소한 일상, 평범한 나의 하루를 남은 위대한 날들의 첫날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런 오늘을 삶의 마지막 날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가족을 태우고 바다로 돌진한 한 가족의 죽음을 보면서, 릭키의 벅찬 느낌을 살아있는 모두에게 전해주고 싶다.

김중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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