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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뇌록색의 아름다운 이상향, 안중식의 ‘도원행주’

미술사 연구자

안중식(1861-1919),
안중식(1861-1919), '도원행주(桃源行舟)', 1915년(54세), 비단에 채색, 143.5×50.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원행주'는 회화의 감각적 아름다움이 시각을 아찔하게 매혹하는 채색 산수화다. 감각은 소용돌이치듯 솟아오른 드라마틱한 봉우리에 화사하게 얹힌 색에서 먼저 훅 끼쳐 온다. 특이한 녹색은 영어로 말라카이트(malachite)인 공작석 돌을 갈아서 만든 석채 안료로 뇌록(磊綠)으로 부른다. 청록산수화 뿐 아니라 건축물 단청에도 뇌록색을 많이 쓴다.

이 그림은 중국 시인 도연명이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써놓은 무릉도원을 그린 도원도다. 색채로써 그런 이상향을 현시하는 듯하다. 주제의 형상화는 물론 재료와 기법에 대한 장악은 안중식이 미술 작품의 보편적 시각성에 정통한 대가임을 보여준다. '도원행주'의 장식적이면서 환상적인 화풍은 화가가 1891년과 1899년 두 차례 방문해 장기간 머물렀던 청나라 말 상해 화단과 연관된다.

아래쪽은 분홍빛 복사꽃이 녹색과 짝을 맞추며 도원의 입구를 예비하고, 시선을 위로 올리면 구름 띠를 거쳐 녹색 산봉우리 위로 하늘이 트인다. 구름과 하늘은 깨끗한 비단 바탕인 공백이다. 물길 가운데 배를 저어가는 어부가 있고, 그가 향하는 동굴 안으로 마을의 지붕들이 보인다.

도원에서 뻗어 나온 물길이 지그재그 형태로 엇갈리면서 활기차게 열리고 닫히는 것은 좌우의 산줄기를 가파르게 톱니처럼 구성한 기이한 산세 때문이다. 산의 양감은 다각형 윤곽선의 각진 형태로 중첩하며 견고한 필치로 과장되게 드러냈고, 가는 선과 작은 점을 꼼꼼하게 반복해 요철의 입체감을 정성스럽게 표현 했다. 복숭아나무는 갈색으로 세밀하게 가지를 그렸고, 꽃은 옅고 짙은 분홍 점을 흩뿌리듯 찍었다. 세로가 가로의 3배가 되는 길쭉한 비례여서 구도가 더욱 인상적이다.

화면 오른쪽 위에 써 넣은 글은 당나라 왕유의 '도원행'이다. 도연명 이후 지어진 비슷한 글들 중 가장 유명하다. 마지막 줄에 '시(時) 을묘(乙卯) 모춘(暮春)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으로 서명했다. 낙관인은 '안중식인', '심전'이고 머리도장은 비단 바탕이 조금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지만 '진전한화(秦篆漢畵)'다. '진나라 전서, 한나라 그림'이라는 인장은 안중식의 고전에 대한 존중을 말해준다.

안중식은 직업화가였지만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을 두루 잘 썼고 한시도 잘 지었다.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한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익숙했다. 도원도는 어느 시대나 인기 있는 주제지만 특히 일제강점기에 많은 화가가 그렸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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