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춘추칼럼] 아버지 노릇 하기의 어려움

장석주 시인(인문학저술가)

장석주 시인(인문학저술가)
장석주 시인(인문학저술가)

어려서 외할머니 아래서 외삼촌들과 함께 자랐다. 오랫동안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기억에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고향을 떠나 낯선 고장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북부의 운천이라는 소도시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운천이 어딘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미군부대에서 용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자식을 떼어 놓고 낯선 고장에서 삶을 개척하는 젊은 가장의 수고와 고단함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열 살이 될 때까지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자랐다. 영유아기 때 아버지와의 접촉 기억은 없다. 너무 어린 시절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엷은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 어쨌든 아버지의 자애를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한 것은 내 불운이다. 아마도 아버지의 사랑과 따뜻한 훈육을 충분히 받고 자랐다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아버지 노릇 하기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사로잡혔던 데는 그런 곡절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자신에게서 쪼개져 나온 또 다른 자기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신의 유전형질을 물려주며 거기에 아들은 후천적으로 아버지를 닮고자 노력한다. 육아에서 배제된 아버지가 자식의 성장에 끼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아버지는 자식의 지능, 사회성, 언어능력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인간 사회에서 아버지가 제 자식에게 애정을 쏟고 돌보는 현상은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포유류 전체에서 보면 포유류 수컷 중에서 제 자식을 돌보는 것은 불과 5% 정도라고 한다. 포유류에게 아버지의 돌봄 현상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자식 돌봄은 자식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위한 일종의 투자다. 아버지의 부재는 분명 자식의 신체나 인지 측면에서의 발달과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버지와 떨어져 산다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의 돌봄 투자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미다.

모든 남성이 어른이 되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임신 가능한 이성 배우자와 결혼을 하고, 상대가 수태를 하고 출산을 하면서 아버지가 된다. 물론 사회적 입양을 통해 아버지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자식 돌봄의 의무를 기꺼이 지는 일이고, 자식의 사회성과 도덕성에 방향과 지침을 주는 존재로 살겠다는 약속이다. 아버지는 자식이 따라야 할 깃대, 이상적인 모델, 자기만의 영웅이다.

전통사회에서 아버지 노릇의 가장 큰 부분은 가족을 위한 '식량 조달'이다.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가족의 기초 생계를 해결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헐벗지 않게 하며,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재우는 일이야말로 아버지 노릇의 고갱이다. 더 나아가 좋은 아버지라면 자식과 감정적 소통, 깊은 유대 관계를 쌓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자식의 생존과 번식 활동에 기여를 하여야 한다. 아울러 자식에게 평생을 사랑하고, 마시고, 미소 짓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아버지는 40대라는 이른 나이에 일손을 놓고 물러나 허송세월했다. 대부분의 날을 직업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스스로를 놓아 버린 듯 무기력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부정적 표상이었다. '난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사춘기 너머 나는 늘 반항하는 아들이고, 아버지는 내심 그런 아들을 거두는 일을 버거워했을 것 같다. 나와 아버지는 데면데면했고, 나는 또 나대로 방황을 하고 혹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야 문득 깨닫는 게 있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스무 해가 지났다. 아, 아버지! 엷은 슬픔 속에서 탄식하듯이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아버지 노릇 하기란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혈혈단신으로 제 생의 길을 뚫어야 했을 젊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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