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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탑건'과 '탑건' 사이

박지형 문화평론가

박지형 문화평론가
박지형 문화평론가

'탑건 : 매버릭'이 국내에서 무난하게 흥행하고 있다. 이 영화는 36년 전 개봉했던 '탑건'의 속편인데, 당시 그 영화는 세계적으로 3억 달러 이상의 흥행수익을 거둔 초대박 흥행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흥행했던 그 탑건이 1987년 한국 개봉에서는 의외로 크게 히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유로는 같은 기간 개봉했던 경쟁작들이 만만치 않았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아야 하겠지만, 87년 6월 항쟁 이후 잔뜩 고무되어 있었던 대학생들의 소위 '반미자주' 의식도 한몫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들은 멋진 F-14를 몰고 온 톰 크루즈의 간판그림 아래서 쇠파이프를 들고 관람객을 위협하는 등의 다소 원시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이것은 'UIP직배'라 불리는 할리우드 영화의 임박한 대공습을 사전 차단하겠다는 의지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듯하다.

지금 들으면 너무 이상하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직배 극장에다가 뱀을 풀어 놓거나 최루탄을 살포하거나 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었다. 최악의 사건은 역시 강남 시네하우스 방화사건이었는데 아무리 관객이 거의 없는 새벽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도, 직배 영화를 거부한다는 명분만으로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버린 시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극렬한 저항도 단기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90년 '사랑과 영혼;이 개봉해 버리자 드디어 전대협 학생들마저도 슬쩍 쇠파이프 대신 연인들의 손을 잡고 직배 극장에 숨어드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했다. 이북의 '오리지널 주체사상'도 손예진을 봉쇄할 수 없는 판에, 애초 잔디밭 막걸리 사상 따위가 우피 골드버그를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인들 또한 그냥 백기를 들고 항복할 리 없었다. 이들은 스크린쿼터 투쟁이라는 새로운 전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왜 할리우드와 홍콩은 되는데 우리 영화는 안 되는가?"라는 자성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자못 선구적이었던 이유는 일본과 대만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일찌감치 실사 영화로는 할리우드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자체진단을 내리고 '애니'에 올인하는 전략을 취했으며, 대만은 미국의 달콤한 비교우위론(영화는 우리가 만들 테니 너희는 전자제품이나 열심히 만들어라.)을 수용하면서 자국영화의 무장을 스스로 해제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질문의 해는 하루아침에 구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나 톰 크루즈가 다시 한국을 찾아온 오늘날, 우리는 OTT 플랫폼에서 할리우드 부럽지 않은 영상 콘텐츠들을 연이어 세계의 하늘로 이륙시키고 있다. 산업화 세대가 묵묵히 밭을 갈고, 민주화 세대가 억척스레 씨를 뿌린 것이 이제 바야흐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다음 세대는 '탑건'과 '탑건' 사이,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불굴의 감투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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