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2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부운(浮運)<2> - 김병우

서울대 출신임에도 불명예제대 이후 임시직 전전…빚내서 과자공장 차렸지만 부도
빚쟁이 피해 가족 뿔뿔이 흩어졌다 부산 달동네서 상봉

1960년대 중반 대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김병우 씨와 어머니 백갑순 여사
1960년대 중반 대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김병우 씨와 어머니 백갑순 여사

아버지는 당신의 전쟁에 관한 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장남인 나한테까지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편으로는 전쟁의 상흔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마음에만 두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를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말하지 못할 사연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당신의 가슴에 묻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탈영' 때문에 상이용사 혜택도 받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머리에 총상까지 입으며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탈영으로 인한 불명예 제대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 오명이 평생 당신의 인생을 옥죄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원망했다. "할매가 탈영만 안 시켰어도 상이용사 혜택 받아 너거한테 다 도움이 될낀데." 어머니의 원망은 아버지에게도 미쳤다. "잘난 대학 나오면 뭐 하노. 천하의 헛똑똑이가 너거 아부지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아버지는 네 남매의 막내였다. 할아버지도 사형제 중 막내였다. 두 분 모두 막내의 운명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마흔아홉 살밖에 살지 못했다. 할머니는 아비 없는 네 남매를 힘들게 키웠다.

아버지는 위로 누님이 세 분 있었다. 아들로는 혼자였다. 형이 둘 있었는데 돌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 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애지중지 키웠다. 어릴 적, 동네에서 불렸던 아버지 이름이 '붙돌이'였다. 아버지의 아명이었다. 그 아명에는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 바라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손위 누나들은 아버지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몫까지 떠안고 있었다. 할머니는 문전옥답을 팔아, 아버지의 뒷바라지에 공을 들였다.

중고등학교를 대구에서 마친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법대에 합격했다. 판검사 나왔다고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가는 곳마다 아들 칭찬에 할머니는 정신이 없었다.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아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고향 문중 어른들 역시 아버지를 문중을 빛낼 기대주로 여겼다.

아버지가 대학 3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 나이 22세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중에 징집 명령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해 8월 30일이었다. 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조차 연락을 끊고, 곧장 전선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제주도 임시훈련소로 차출되었다. 거기서 신병 교육 조교가 되었다. 아버지는 군 생활에 잘 적응한 것 같았다. 당시 부대로 면회 간 친구들 앞에서 군마를 조련하는 시범을 보였다. 그런 아버지를 친구들이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처럼 당당했던 아버지에게 불명예제대라는 치욕적인 경력이 따라붙었다. 아버지는 어디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의 직업은 고등학교 임시 교사, 신문사 기자 보조가 전부였다. 정식이 아닌 임시직이었다. 그것도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았다. 아버지는 가장이라는 삶의 궤적에서 점점 이탈해 갔다.

어머니가 얻어온 빚으로 아버지는 부채과자(센뻬이) 공장을 차렸다. 잘된다는 입소문만 듣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아버지는 머리 통증 때문에 신경 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한 사람에게 공장 일을 맡겼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노름을 했다. 나중에는 첩살림까지 차렸다. 그 바람에 공장은 부도가 났다. 아버지는 졸지에 빚더미에 앉았다.

그즈음 어머니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포목점을 열고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인 1967년 1월이었다. 구정 대목을 노리던 어머니는 가게에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많은 포목을 들여놓았다. 대부분 외상으로 들여온 물건들이었다.

하루는 장사를 나간 어머니가 마당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풀어진 한복 옷고름, 평소와 다른 모습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의 옆구리에는 탄약통이 들려있었다. '돈통'이었다. 서문시장에 큰불이 나자, 그것만 들고 불타는 포목점에서 나왔던 것이다.

대낮에 일어난 불은 마치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면서 시장통 사이사이를 새파랗게 할퀴고 다녔다. 다닥다닥 붙은 재래시장의 구조상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포목점은 결국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빚에 어머니의 빚까지 겹쳤다. 우리 가족은 졸지에 알거지가 되었다. 빚쟁이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나와 동생들은 학교도 가지 못했다.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이모 식당에 갔다. 이모는 북구 고성동의 대구시민운동장 앞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이모는 거지꼴로 나타난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이 불쌍한 놈' 하며 먹을 것을 주었다. 그날 이후, 동생들까지 이모네 식당 앞을 기웃거렸다. 칠성동 굴다리는 자주 찾아가는 아지트였다. 잠도 거기서 자면서, 넝마주이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배도 고프고 집일이 궁금했다. 살며시 집 근처로 몰래 갔다가 빚쟁이에게 붙잡혔다. "니가 이 집 큰아들 맞지! 잘 걸렸다. 너거 아부지 어디 있노?" 눈에 핏발이 선 50대 아저씨 하나가 내 멱살을 잡았다.

"모릅니더."

"이놈 봐라. 바른말 안 하면 니도 깜빵에 처넣는다!"

그 아저씨가 주먹으로 내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알면서 시치미를 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있는 곳을 대라며 윽박질렀다. 겁먹은 나는 울면서 그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대들었다. 이놈이 죽고 싶냐며 나를 기둥에 거꾸로 매달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숨조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조금 있으니 스르르 잠이 왔다. 그때 나를 풀어 주라는 말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어린 아가 무슨 죄 있노. 남의 돈 떼먹고 달아난 지 애비가 나쁜 놈이지!"

빚쟁이 중 누군가가 한 말이었다.

대구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만 데리고 부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영도다리 근처 자갈치 시장에서였다. 갯내가 물씬 풍기는 부산 바다와 갈매기 떼를 처음 보았다. 바아앙~ 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 나는 좌판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버지는 소주를, 나는 고래고기를 왕소금에 찍어 먹었다. 그 당시 고래고기는 꽁치보다 더 흔한 고기였다.

그때 아버지는 부도난 부채과자 공장이며 포목점 불난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욱신거리는 머리 통증을 지그시 누르며 삶의 고단함을 뼛속 깊이 새겼겠지만, 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을 뿐이었다. 남들 아버지처럼 든든한 가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래고기를 먹을 때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목구멍으로 마구 넘어오는 것 같았다.

'부운'의 주인공 김종식 씨가 부산 달동네에 살던 당시 손위 누님 2명과 함께 찍은 사진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1968년 봄이었다. 부산 바다가 보이는 산언덕 달동네에서 여섯 식구가 다시 만났다. 동생들은 거지가 따로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와 동생 셋은 친척 집으로 흩어져 빚쟁이 눈을 피했다. '마당 깊은 집' 소설 속 길남이네 셋방처럼 여러 방 중의 단칸방이었다.

달동네는 구조상 디귿 또는 기역 자 형태의 집이 많았다. 그 좁은 공간에서, 많게는 여덟 식구, 적게는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공동변소는 대문 옆에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 공동변소 앞에 늘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사용 중인 사람이 안에서 늑장을 부리면, 줄 가운데에 누군가가 가래침을 뱉었다. 줄 선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빨리 볼일을 보라는 신호인 줄 다 알았다.

그 지긋지긋한 공동변소 생활도 일 년 만에 끝이 났다. 우리 가족은 살고 있던 셋방보다 조금 더 비탈진 곳의 집으로 이사했다. 달동네는 위로 올라갈수록 집값이 헐했다. 10평 남짓했는데, 단칸방에 부엌이 딸려 있었다. 셋방보다 크게 나을 게 없었다. 지붕은 눈비를 막기 위해 기름을 먹인 두껍고 뻣뻣한 가빠로 덮여 있었다. 그 위에 어른 머리만 한 돌들이 군데군데 얹혀 있었다.

겨울이면 여섯 식구가 한 이불을 덮고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동생들과 몸을 부둥켜안았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이 추위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바닷바람 탓인지 꽃샘추위조차 심했다.

갈라진 방바닥 사이로 들어온 연탄가스에 온 식구가 중독된 적도 있었다. 사경을 헤매며 좁은 골목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상태에서 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이불을 동생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목까지 끌어당겼다. 그래도 추웠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아버지 무릎 위에 내 몸의 상체가 뉘어져 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다. 막내는 그때까지 차가운 땅바닥에서 죽은 듯 자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 무릎 위에서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어쩌면 그리도 초롱초롱하던지. 그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그렇게 맑고 밝은 별을 본 적이 없었다.

어수선한 달동네라 불량기 있는 형들이 있었다. 그들은 같은 동네 아이들은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며 어른스러운 말까지 해주었다. 담배를 피우다가도 동네 어른들이 보이면 달아나든지 숨어서 피웠다. 길을 가다가 어른들을 만나면 인사도 빠뜨리지 않고 깍듯했다. 무표정한 아버지는 달동네 형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형들은 아버지를 피했다.

※2022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부운' 3편은 다음주 화요일(19일)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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