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드립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궁금한 점은 없으십니까.'
콜센터 상담원의 말은 매뉴얼화된 언어다. 고객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습관화된 언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콜센터의 말은 일상어의 기계적인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절대적 공감을 요구하는 고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이익을 지향하는 회사의 목적을 충족해야 한다. 이처럼 까다로운 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해 상담원은 결국 '숨 쉬듯 용서를 비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대구 출신 이예은 작가의 에세이 '콜센터의 말'이 출간됐다. 제9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저자가 2020년 1월 일본 여행사의 콜센터에 입사 후 겪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일본 콜센터에서 520일'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한 원고에 고객과의 에피소드와 콜센터 바깥의 이야기를 추가했다.
저자는 2015년 한국에서 하던 호텔 홍보 일을 그만두고 일본에 살기 시작했다. 영어에 능통한 덕분에 일본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도 수월했지만, 남편의 해외 출장 때문에 일을 다시 그만둔 이후로 상황이 바뀐다. 입사와 퇴사를 반복한 외국인 기혼 여성을 환영하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저자는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일본 회사의 불합격 메일은 일관된 형식을 띤다. 시작은 언제나 내어 준 시간에 대한 심심한 감사와 지원자의 역량에 대한 입바른 칭찬이다. 본론은 '대단히 유감이지만'이라는 말 뒤에 등장한다. 거듭 탈락 통보를 받다 보니, 나는 메일을 받으면 '유감'이라는 단어부터 훑는 경지에 도달했다. 이 단어가 포착되면 십중팔구 불합격이라는 뜻이다."
연이은 불합격 소식에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쯤, 일본 여행사의 콜센터에 간신히 취업한 저자는 초보 상담원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콜센터는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일상적인 말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곳이다. '송구합니다'같은 사과의 말은 더욱 그렇다. 자존심이 강한 저자는 평소 사과를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콜센터 상담원은 때로는 없는 잘못도 만들어 적당히 사과할 줄 알아야 했다.
"우습게도 콜센터에 들어온 뒤로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숨 쉬듯 용서를 비는 인간이 되었다. 고객이 각양각색의 사연을 들고 마치 맡긴 물건을 찾는 양 사과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중략) 끝까지 나 자신을 위해 지켜 낸 사소한 원칙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면, '사과드립니다.'라는 문장 앞에 '진심으로'라는 수식어만큼은 결코 쓰지 않는 것."
물론 수화기 너머 들리는 고객의 거칠고 무례한 말에 상처받는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협력해 주세요' 같은 표현들은 콜센터 상담원들이 서로에게 힘을 주는 말이다.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 적응하면서 저자가 만났던 위로와 환대의 말들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국땅에서 일하는 저자가 느낀 혼란과 자신만의 수용 과정, 나아가 깨달음을 솔직하고 담백한 문체로 풀어낸다. 너무 익숙해서 지나쳤던 말들을 책을 통해 곱씹다보면, 그 말의 온도와 질감이 조금은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200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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