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2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부운(浮運)<3> - 김병우

따뜻한 말 한 번 않던 아버지…일찍부터 가장 행세를 했던 어린 아들
먹고 살기 위해 온 가족이 '봉투 붙이기'에 매달리기도

1978년 김종식(왼쪽) 씨가 두 아들 김병우(가운데), 김병학 씨와 함께 찍은 사진
1978년 김종식(왼쪽) 씨가 두 아들 김병우(가운데), 김병학 씨와 함께 찍은 사진

일찍부터 가장 행세를 했던 나는 학비도 스스로 벌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신문 배달, 가정교사였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중학생과 초등학생 남매를 가르쳤다. 그들 아버지가 원양 어선을 타서 비교적 잘 살았다. 그 집 주인 아주머니는 수업 때마다 생전 처음 보는 외국 과자며 과일을 주었다. 집에 동생들 가져다주라며 한 보따리 싸 주기도 했다. 엽전처럼 생긴 새콤달콤한 초콜릿의 묘한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들 성적이 올랐다고 보너스라며 과분한 돈을 살며시 쥐여 줄 때도 있었다. 가난한 내 형편을 아는지라 그렇게 학비를 도와준 것이었다.

내가 가르쳤던 그 남매의 아버지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배 타는 사람은 거칠고 무섭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나 보고도 자기 아이들을 가르쳐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가정을 위하는 그 집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비교되었다. 부럽기 짝이 없었다. 한편으로 우리 아버지는 왜 이렇게 가족을 보살피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끝내고 비 맞은 생쥐처럼 집으로 들어오는 나에게, "힘들제. 얼른 밥 묵어라." 아버지는 이런 말조차 한 적이 없었다.

신문 배달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동생들이 하는 봉투 붙이기 작업을 거들어야만 했다. 손가락 끝에 풀이 묻었다. 그 손가락이 종이에 스치다 보니 닳아서 피가 나고 아렸다. 겨울철이 더 심했다. 무일푼으로 낯선 땅에서 정착하는 과정은 언 땅을 맨손으로 파는 심정이었다.

먹고 살길을 찾는 것은 어느새 어머니의 몫이 되어 있었다. 자식들 학교에 보내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봉투와 꼬리표를 만들어서 인쇄소와 문방구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한 것도 어머니였다. 그때만 해도 기계 작업이 있기 전이었다. 일일이 손으로 접고 풀로 붙였다.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오면 책가방 던져놓기 바쁘게 작업대에 둘러앉아야 했다. 그리고 밤늦도록 온 가족이 다음날 납품할 작업에 매달렸다. 새벽까지 일할 때도 많았다.

아버지는 가족이 하는 일에서 열외였다. 아버지는 어디서 얻어 온 신문을 보거나, 초점 흐린 시선을 밖으로 내던질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어머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납품 일자를 지키지 못하면 거래처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일에만 신경 썼다.

철없는 동생들은 밖에 나가 놀고 싶어 했다. 일손 하나가 아쉬운 판이었다. 어머니만 애가 탔다. 나는 잠을 줄여가며 동생들 몫까지 해야만 했다. 아버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좌우명을 하나 가졌다. '가장 바쁜 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갖는다.'였다. 힘들 때마다 그 좌우명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삶' 역시 나를 다지는 데 효과가 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몸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실상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자식들이 상장을 받아올 때였다. 밥을 굶어도 배가 부르다며 기뻐했다. 아버지는 이때만큼은 자신에 차 보였다.

좁은 방 사방 벽은 상장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3남 1녀가 번갈아들고 오는 상장들이었다. 공부 잘했던 둘째가 벽면을 가장 많이 차지했다. 내 상장은 제일 적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내 결렸다. 아버지는 가끔 내 상장을 손으로 어루만지곤 했다.

달동네에는 개척 교회 하나가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양철 십자가를 걸어놓은 교회였다. 담은 블록으로 엉성하게 지어서 창고 같았다. 그곳에서 예배를 보았다. 단골 신자들이 다 차도 스무 명을 채 넘지 못했다.

김병우 씨(왼쪽 첫 번째)가 어린 시절 부산 달동네 개척 교회의 성탄절 행사에 참석해 찍은 단체 사진
김병우 씨(왼쪽 첫 번째)가 어린 시절 부산 달동네 개척 교회의 성탄절 행사에 참석해 찍은 단체 사진

크리스마스 몇 달 전부터는 동방 박사 연극 연습에 바빴다. 나는 학교 갔다 오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봉투 일도 거드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교회 일이라면 열 일을 제쳐놓고 나섰다. 고등학교 때는 고등부 학생회 회장까지 맡았다.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내 교회 생활을 탓하지는 않았다. 내 신앙생활에 무관심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었다.

젊은 전도사 한 분이 있었다. 목회도 보고 총책임자였다. 중학교 때 그분의 전도로 동네 또래 학생들이 그 교회에 많이 다녔다. 그 전도사님이 나를 불렀다. 앞으로 목회자가 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 있는 침례 교회에는 한국에 있는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양성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지원하려면 한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부모님의 동의서였다.

혼자서 고민하다가 용기를 냈다. 아버지에게 미국에 공부하러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니 보내달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끝내 고집을 부리고 네 뜻대로 한다면 호적에서 이름을 파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교회도 가지 말라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처음 보았다. 아버지에게 혼이 난 이후로 두 번 다시 미국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바로 직장을 구했다. 친척의 지인인 변호사 밑에 일하는 사무보조원 자리였다. 바쁜 사무장 일을 거들며 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동생들이 셋이나 되어 경제적으로 아버지를 대신해야 했다. 대학은 돈을 벌어서 야간대학을 다닐 생각이었다.

돈이 거의 안 드는 대학이 나타났다.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이었다. 주경야독할 절호의 기회였다. 2년제 초급대학이었다. 졸업하면 편입 시험을 쳐서 4년제 대학으로 갈아탈 수가 있었다.

학비를 모아 편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니. 몸은 파김치였지만 마음만은 날아갈 것 같았다. 매주 집으로 배달 오는 서울대학교 학보사 신문에 방송통신대학 신문이 뒤쪽에 끼워져 있었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신문으로 접했다. 내가 서울대 학생이나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글이 서울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중에는 찢겨진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느낀 점을 장문의 글로 써서 보냈더니 채택되었다. 원고료까지 손에 쥐니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나를 대견해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나는 아버지의 관심을 은연중에 거북해하고 있었다.

졸업식 날이었다. 서울대학교 운동장은 전국에서 모인 졸업생들로 장관을 이뤘다. 서울 사는 친구가 꽃다발을 들고 축하해주러 왔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아버지의 부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군 제대 후였다. 직업 선택의 갈림길에서 잠시 방황한 적이 있었다. 군에 가기 전 다녔던 변호사 사무실 일은 장래성이 불투명했다.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온 가족이 매달려 하던 봉투 사업을 생각해보았다. 크게 확장해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기존 거래처 외에 새로운 거래처를 뚫기 위해 여기저기 인쇄소로 뛰어다녔다.

그때만 해도 대금 결제를 현금으로 거의 하지 않았다. 몇 달 치 어음으로 끊어 주는 게 통례였다. 한 곳만은 꼭 현금으로 결제해 주었다. 그곳 인쇄소 사장 딸이었다. 그녀는 카운트에서 경리 업무를 맡고 있었다. 대금을 깍지도 않았다. 나로서는 고맙기 그지없었다.

사장이 나를 눈여겨본 것 같았다. 내가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 사장이 하나뿐인 딸에게 사업체를 물려줄 거라는 얘기를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나를 사윗감으로 골랐다는 뜻이었다.

"우리 집 형편이 빤한데 그 집과 어울리겠나?" 아버지가 걱정스레 말했다.

"나쁠 것도 없잖아예!"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와 밖에서 만나 차를 몇 번 마셨다. 나이가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다. 그녀는 주로 자기 아버지 사업 이야기를 했다. 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사업 깡다구가 있어야 한다. 나한테는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좋아 보여도 사업자로서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내게 결재해줄 때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기분이 언짢았다.

그녀와는 결국 좋은 감정만 갖기로 하고 끝냈다. 봉투 사업을 통해 다른 사업에도 관심이 갔다. 그러나 거래 관계의 냉혹함, 밤낮으로 긴장해야 하는 생활과 끝없이 이어지는 경쟁심, 그녀가 하던 말 등이 사업에 관한 내 흥미를 떨어뜨렸다. 내가 사업이나 장사판이 체질에 맞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잊어뿌라 마. 니만 괜찮으면 된다." 아버지는 나를 위로했다.

이젠 빚도 갚고 어느 정도 먹고 살만했다. 나는 내 갈 길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는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야간대학 법학과에 편입한 상태였다.

"아부지, 나도 고시 공부 한번 해볼랍니더."

"니 자신 있나!"

"최선을 다해 봐야지 예."

"그러잖아도 니 사주를 봤다. 나라 녹은 먹게 생겼다고 하더라."

아버지는 희망 섞인 메시지를 내게 던졌다. 동네 사주쟁이 핑계를 대면서였다. 원래 아버지는 사주를 믿지 않았다.

우리 달동네에 절뚝발이 아저씨가 살았다. 그 아저씨는 달동네 사람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뜸도 떠주었다. 사주에 해박하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자자했다. 이웃들이 그 아저씨를 통해 대소사를 택일했다. 자연히 달동네 길흉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우리 집만 거래가 없었다. 거래도 하지 않는 사주쟁이에게 아버지가 갔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는 단지 내 결심에 확신을 불어넣고 싶었던 것이다.

※2022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부운' 4편은 다음주 화요일(26일)에 게재합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