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를 소중히 여겼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역모나 패륜과 연루되면 읍호를 강등하는 건 물론 지명을 바꾸기도 했다. 우리 지역에서도 순흥도호부가 조선 세조 때 사라졌다. 단종 복위를 도모했다는 금성대군을 역모죄로 엮으면서다. 이름을 다시 찾기까지 226년이 걸렸다.
잦은 지명 교체의 끝판왕은 충청도다. 100여 년(1505~1612년) 동안 지명이 여덟 번 바뀐다. 1505년 연산군 때 환관 김처선이 임금의 폭정을 비판하다 양자 이공신과 함께 죽임을 당한 뒤 이공신의 고향인 청주목이 폐지돼 충공도로 바뀐 게 시작이었다. 이후 충주와 공주도 번갈아가며 곤욕을 치렀다. 청공도, 청홍도, 충홍도, 공충도로 이름이 바뀌는 등 숱한 지명 교체를 겪었다.
생긴 대로 붙은 지명이 오래 기억된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걸어도 걸어도 끝도 한정도 없이 펼쳐져 있는 들판"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벌판"이라 묘사된 곳은 전북 김제시 광활면이다. '광활하다'는 말 그대로다. 언덕 하나 없는 김제·만경평야의 일부다.
사람도 그렇다. 습성이나 행동을 동물에 빗대 붙인 별칭은 선명한 잔상을 남긴다. 산을 잘 타는 이에게 '날다람쥐', 헤엄을 잘 치는 이에게 '물개'는 기예 인증서나 다름없다. 서술적 예칭(譽稱)도 있다. 김훈 작가는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서 1·4 후퇴 때 내려왔다는 장기판의 고수 최 씨 노인을 '상(象) 잘 쓰는 사람'으로 듣고 기록했다. 사실만 전하지만 고수의 기운이 묵직이 실린 호칭이다. 상대의 본진을 유린하던 '상'(象)이 최 씨 노인을 기억하는 이들의 뇌리를 휘저을 것이 분명하다.
춘천에 '손흥민 거리'를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다. 손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씨는 "그럴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답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아웅다웅 다투던 노욕의 낯 뜨거운 작태와 대조된다. 축구 스타의 이름을 딴 거리명이 없는 것도 아니다. 경기 김포 이회택로, 수원·화성 동탄지성로가 있다. 손 씨의 겸양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스스로를 아름답다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꽃을 보기 위해 그 아래에는 길이 저절로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路)는 말이 겹친다. 실력은 이름을 알릴 뿐, 이름을 빛내는 건 겸손이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한덕수 "24일 오후 9시, 한미 2+2 통상협의…초당적 협의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