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를 졸업하고 의전원으로 들어온 전공의가, '컴퓨터'가 아닌 '사람'을 읽는 게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공대에서는 주로 컴퓨터에서 데이터를 읽어내지만, 의대에서는 '사람'의 얘기를 읽어내야 하니, 소화가 안된다는데 알고 보면 심장병이라든지, 다리가 저리다는데 사실은 뇌경색이었다든지 하는 식으로, 다양한 화법을 가진 환자들이 하는 얘기에서 숨은 진짜 데이터를 읽는 게 힘들다는 거였다. 그렇다. 의사는 '병'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는 직업이다. 그렇다 보니 의사와 환자 간에도 사람 대 사람으로 주고받게 되는 '마음'과 '감정'이 있다.
내 환자 준기는 조산으로 태어나 뇌병변을 가지고 있는 뇌성마비 환자다. 공부를 잘해서 의대 진학을 꿈꾸기도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최고 기업이라는 S사에 입사했을 땐 내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던지. 김영란법 전, 외래 진료를 마치고 준기가 쓱 내민 건 케익이었다. "첫 월급 받았거든요" 그 케익이, 첫 월급으로 아들이 사준 내복같이 보였다. 케익은 달디 달았다.
장호는 내 아들과 동갑이었다. 심지어 생일도 하루 차이밖에 안 났다. 키가 훤칠하고 얼굴도 뽀얘서 인기도 많을 것 같은 녀석은 뇌종양으로 항암치료 중이다. 어른들도 암 치료를 힘들어하듯이, 항암치료를 하는 어린 환자들은 짜증도 많고 한번에 끝나지 않는 치료에 거부감이 심하다. 항암치료를 안 해봤으면 모를까, 이미 시작한 데다 마비 때문에 혼자 옷도 못 입는데 장호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괜찮냐는 질문에 장호는, "괜찮아요. 의사선생님들 하라는 대로 하면 되죠. 제가 암에 걸린 게 억울하진 않아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대답을 하는 장호 얼굴이 예뻐 보였다.
그런가 하면 환자나 보호자에게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같은 병실 보호자에게, 내 자식보다 니 자식이 장애가 더 심하다고 말하는 엄마, 옆자리의 환자가 기형이 있어 내 마음이 불안해지니 환자를 바꿔달라고 항의하는 보호자. 아픈 자식 치료하겠다고 입원까지 한 부모 마음은 똑같을 텐데 어찌 그리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는지. 재활치료라는 게, 일주일 항생제를 맞으면 열이 떨어지고 맹장을 떼내면 바로 괜찮아 지는 게 아니라서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외롭고 힘든 싸움이다. 거기다 자식이 아프다는 건 무엇보다 부모를 힘들게 하는 일인데, 본인도 상처를 가진 엄마가 어떻게 거기다 소금을 뿌릴 수 있는지. 이런 상황을 알게 되면 보통 내가 중재하지만 상처받은 엄마가 치료를 포기하고 퇴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모든 환자가 똑같이 다 소중하고 각자에게 최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이렇게 미운 말을 하는 보호자는 종종 나를 맥빠지게 한다. 상처받은 마음을 내게 들킨 엄마의 눈물을 본 날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힐 때도 있다.
이렇게, 나는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환자를 보며 울었다 웃었다 한다. 넌 아직 멀었다, 싶기도 하지만 이게 의사로 내가 사는 모습이다. 오늘도 환자 때문에 의사 손수민은 울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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