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창원의 기록여행] 야간열차는 쓰리꾼을 조심하자

해방 후 주요 교통 수단…고장·석탄 부족에 운행 어려움 겪어
승객 꽉 채운 기차…금품 노린 소매치기 설치기도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8월 28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8월 28일 자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운수부장 발표에 의하면 남조선 철도 관계 각 요직에 있던 일인(日人) 2만7천5백 명이 철퇴한 후 3만5천4백여 명의 조선인 종업원들은 일인이 해방 전 5년간에 완성하지 못한 철도 각 부문에서 기 수준에 달하였다고 한다. 즉 수선할 수 있는 기관차와 객차는 전부 수선하여 다시 운전하고 있으며 각 신호 계통도 점검 수선하였다고 한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8월 28일 자)

기차는 해방 후 교통의 주요 수단이었다. 이용객이 늘자 철도경찰을 만들어 여객 보호에 나설 정도였다. 하지만 기차 운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고장난 열차와 연료난 때문이었다. 패망으로 일본 기술자들이 돌아간 뒤 고장난 기차의 수리는 우리 기술자들이 맡았다. 처음에는 숙련도가 낮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의자가 부서지거나 창문이 깨지고 화물칸에 비가 새기도 했다. 부품난도 운행의 발목을 잡았다. 해방 이듬해 대구부내 여러 대의 버스가 몇 달째 멈춰선 이유와 같았다. 고장난 버스를 제때 고치지 못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차고에 세워둬야 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2월 21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2월 21일 자

'~2회 왕복밖에 남지 않은 경부본선에 있어서는 5시간 내지 10시간 정도의 연착 연발이 속출되고 있었다. 작 20일에 이르러서는 대구~춘천 간과 대구~경주 간의 3회 왕복이 운휴 상태에 빠지고 당분간 이 상태는 계속될 우려가 충분하다고 하는데~'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2월 21일 자)

열차 도착이 턱없이 지연되고 운행 횟수 또한 줄었다. 석탄 부족이 원인이었다. 조금씩 나아졌던 철도 운행이 다시 뒤뚱거렸다. 화물열차는 대부분 운행이 중단됐다. 이로 인해 농산물 등의 공급이 막혀 물가마저 들썩였다. 운행 횟수가 급속히 줄자 승객들은 열차 타기 전쟁을 벌였다. 하루에 두 번씩 왕복했던 대구~경주 간 열차도 1회로 감축했다. 1947년 12월에 대구역의 하루 차표 판매 수량은 3등칸 20매, 2등칸 10매에 불과했다.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에 첫 열차가 나올 때부터 객차 등급은 있었다. 애초 외국인과 남녀를 따로 태웠다. 해방 후에도 객차 등급은 유지됐다. 해방자호 같은 특급열차는 등급에 따라 요금 차이가 컸다. 서민들은 3등 칸을 주로 이용했지만 1등칸과 2등칸의 좌석도 꽉꽉 차기 일쑤였다. 3등칸 표를 끊은 승객들이 1·2등칸에 막무가내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승무원들은 1·2등칸에 탄 3등칸 승객을 가려내는데 진땀을 흘렸다. 게다가 차표 없이 타는 승객도 한둘이 아니었다.

1등칸을 없애고 3등칸을 늘리라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요금이 버스에 비해 비싼데다 수시로 올랐다. 승객들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1946년 11월에는 여객 운임이 한꺼번에 2배로 인상됐다. 물가 폭등이 원인이었다. 기차 요금이 오른다는 소문이 나면 수일 전부터 갑자기 승객이 늘었다. 요금이 오르기 전에 기차를 타보려는 사람들이 몰렸기 때문이었다. 놀이기구처럼 기차를 타보려는 사람이 많았다.

'야간열차는 쓰리꾼을 조심하자'는 말이 기차역마다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의 기차에는 소매치기(쓰리꾼)가 득실댔다. 기차여행 중에 자칫하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었다. 무엇보다 야간열차 승객의 피해가 컸다. 열차 출발 직후 객실은 이야기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담배를 피는 승객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하나둘 잠들기 시작하면 소매치기들의 시간이 됐다. 이들은 서울이나 대전에서 열차에 올라 주로 대구에서 내렸다. 소매치기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옷 주머니나 가방이 찢겨 돈이 없어진 것을 안 승객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소매치기가 설치고 때로는 짐짝 취급을 당해도 승객은 크게 늘었다. 기차여행의 묘미를 알게 된 것이었다. 봄이나 여름에는 꽃구경이나 피서를 가려는 여행객이 많았다. 봄이면 서울역은 전국에서 모여드는 나들이객으로 붐볐다. 꽃놀이나 도시 구경을 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창경궁의 벚꽃놀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인기가 있었다. 대구에서 휴일 아침에 700여 명을 태워 서울로 떠나는 임시열차를 운행할 정도였다. 야간개장 때는 조명등을 설치해 분위기를 띄웠다. 승객들은 꽃구경뿐만 아니라 서울 관광도 겸했다.

열악한 열차 환경은 곧바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완행열차를 생각해보라. 회전식 선풍기가 1량당 2개씩 복도와 중앙 천장에 달려있었다. 한여름에 열차를 타면 선풍기 주변에 앉거나 선 사람들만 혜택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선풍기가 고장나 장식품으로 달려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겨울도 다르지 않았다. 객차 사이의 수동문이 고장나 다 닫히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터널로 기차가 들어가면 꼼짝없이 소음과 찬바람에 떨어야 했다.

지금이야 완행열차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소매치기 걱정도 없다. 하지만 가고 싶어도 한여름 기차여행조차 버거운 이들은 여전히 있다. 쉰 기적소리를 내며 멈출 듯 오르막 구간을 힘겹게 돌던 그 시절 기차와 오버랩 된다.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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