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작곡가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다. 그의 곡 중 여럿이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이었다. 처음에는 '몇 구절 비슷하고 말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두 곡을 비교하는 영상을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제대로 음악을 배워본 적 없는 막귀에도 두 곡은 같은 곡이라 느껴질 만큼 비슷했다. 당사자는 한국 음악의 1990년대를 상징하다시피 한 거물급 작곡가였다. 충격을 넘어 슬펐고,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작가의 도덕적 흠이 작품의 감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태도를 촌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이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물론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가 작품 평가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추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만든 작업이라도, 놀라울 만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면 작품은 그것이 가진 미학만으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고, 필연적으로 작품이 가진 아름다움에 항복되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가 작품에 진실함을 담았을 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작가 스스로 작품이 가진 고유성, 순수함, 진실성을 파괴했을 때 작가의 흠은 곧 작품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표현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미지, 소리, 몸 등 방식에 의해 형태가 달라질 수 있어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대화'와 같다. 나는 개가 발을 밟혔을 때 조건반사로 '깽' 하고 소리치는 것과 실연의 고통을 표현한 음악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거칠게 혹은 세련되게 정제되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 두 경우 모두 여전히 표현이고 대화이고 소통인 것이다. 결국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가와 감상자가 하는 대화이다. 작가가 표절과 같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작품을 더럽힌다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쟁이와 신뢰가 상실된 대화를 하는 상황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배신에 분노할 수 있다. 이 분노는 오랜 시간 음악을 통해 그와 진솔히 사귀어 왔다는 방증이다. 그의 음악이 온전히 그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대중과의 관계는 깨어졌다. 예술이란 얼마나 하찮고도 대단한 것인가. 누군가의 표현이 충분히 진실하다면 그 진실성은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어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그렇기에 천재라고 칭송받던 그의 선택은 애석하다. 울적한 마음으로 왜 그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경쟁 속에 내모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진실해야 하는 예술 역시 비교와 인정(認定)의 영역에 있다. 내가 그의 인정 욕구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음악이 자신의 절박한 이야기를 담아내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자 하는 간곡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었음은 알겠다. 그는 음악을 돈과 명예,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을 얻게 해주는 도구로 사용해왔을 것이다.
나는 나를 바라본다. 나 역시 예술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가. 아무런 진실성도 갖지 못한 채 찬란한 껍데기만 남게 된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곧 예술의 종말이다. 하지만 표절에 배신감을 말하는 현 세대의 모습은 다행히 희망적이다. 여전히 예술이 진실돼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한, 예술의 종말은 조금 더 늦춰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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