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요일 아침] 일본 수상은 30년 전에 결정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

꼭 39년 전 일본에 처음 갔을 때 내가 들은 가장 충격적인 말은, 일본에서는 명문가 출신으로 20대에 장관의 비서나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내각과 정당의 여러 자리를 경험한 사람 중에서 50세 전후의 수상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당시 외무상이었던 아버지의 비서인 20대 아베 신조가 30년 후 수상 후보의 한 사람으로 물망에 오르는 것을 보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넘긴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급사한 아버지의 지역구에서 중의원으로 당선되어 10선을 하고 49세에 집권당 대표를 거쳐 2006년 52세에 수상이 되었다. 제1차 아베 내각은 1년 만에 끝났으나 2012년 제2차 내각에서는 8년간 수상을 지내면서 소위 아베노믹스와 아베독트린으로 일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과거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일본 최대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의 회원으로 일본의 재무장 및 군비 증강을 추진하는 등의 그릇된 역사관에 의한 행태로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나도 아베의 역사관과 우익적 행동을 여러 차례 비판했다.

꼭 29년 전 일본에 갔을 때 처음으로 중의원에 당선된 기시다 후미오가 10년 전 아베처럼 장래의 수상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기시다는 아베처럼 명문가에서 태어나 당시 뉴욕영사관에 근무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다닌 초등학생 시절부터 영어에 능통했다. 와세다대학을 나와 은행에 다니다가 30세에 중의원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하고 아베처럼 아버지가 급사한 뒤 아버지의 지역구에서 중의원이 된 뒤 계속 당선됐다. 그리고 50세에 입각해 여러 장관 자리를 돌고 한때는 6개 장관을 겸임했으며 아베 내각의 핵심이 되어 2012년 제2, 3차 내각에서는 55세부터 60세까지 외무상을 지냈다. 그 사이 2015년에 소위 '위안부'에게 '치유금' 10억 원을 준다는 '위안부' 합의를 한 것이 일본에서는 그의 최대 공적으로 평가되었으나, 나는 당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시다는 2021년 10월에 100대 수상이 되어 최초의 기자회견에서 아무 조건 없이 북한 김정은을 만나고 한국과도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기시다는 아베와의 차별을 강조해 왔다. 특히 아베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탈피하고 분배를 중시했다. 이를 두고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유사하다고 평했으나 기시다가 부유세를 도입하겠다고 한 점 등은 훨씬 진보적인 것이었고, 11월에 101대 수상이 된 뒤에는 임금 인하가 아니라 임금 인상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2022년 7월의 참의원 선거 전날 아베가 총격으로 사망하고 압승한 직후 기시다는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는데, 나는 그것이 일본의 군국주의화로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일본을 발전시킨 근원인 평화헌법을 부정하는 점에서도 반대한다. 본래 개헌 문제에 신중했던 기시다가 아베의 죽음으로 변심한 것 같아 유감이다.

아베의 죽음은 그가 제2차 내각 이후 수상 공관이 아니라 사택에서 출퇴근했던 것을 되돌리게 했다. 일본 수상의 집무실 옆에 공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사택에서 매일 출퇴근을 하여 안보 의식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공관에 살았던 수상들 중 피살된 자들이 많아 귀신이 나온다는 탓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아베의 죽음은 또한 일본의 최초 수상으로 해외에서 암살당해 객사한 이토 히로부미를 떠올리게 했다. 아베보다는 짧았지만 약 8년간 네 번이나 수상을 지낸 이토는 한때 일본의 천 엔권 지폐에 새겨지고 일본 의회 메인홀에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일본에서는 유명하지만 그를 비롯하여 기시다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수상은 한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해 유감이다. 30년은커녕 3년이나 3개월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일본의 30년 수상 수련 기간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 장기간에 역사 공부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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