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내 고시 공부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당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인 내가 이루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했을까. 나는 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며칠 뒤, 나는 책 보따리를 챙겼다. 경남 밀양시 부북면으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거기 깊은 산골짜기 어느 폐사지(廢寺址)에 보살이 기거했던 절집 하나가 있다고 했다. 소문만 듣고 갈 작정이었다.
키 큰 잡초가 절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절터 동쪽 귀퉁이였다. 잡초에 파묻히다시피 한 흙집이 하나 보였다. 방문을 열었다. 신문지로 도배된 벽은 누렇게 떠 있었다. 바닥에는 벌레들이 기어 다녔고, 쥐똥투성이였다.
그 절집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일 년, 이 년, 삼 년……. 그렇게 5년이라는 세월을 거기서 보냈다.
나는 좌절할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라면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것이다. 전쟁에 참전만 하지 않았다면, 아니 부상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아버지는 법복을 입은 법관이 되어 있을 것이 아닌가. 할머니가 그토록 자랑했던 자리에 아버지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낙방을 거듭할수록 아버지가 점점 커 보였다.
머리를 식힐 겸 대구 고모 댁에 갔다.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월배에 살았다. 어릴 적 나는 마당 넓은 그 촌집에서 가을걷이며 길흉사 치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고모 딸 전통혼례식을 그 마당에서 천막을 치고 했었다. 고모부 돌아가시는 장례도 그 마당에서 치렀다. 그런 내가 청년이 되어 마당으로 성큼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모는 맨발로 달려 나왔다. 나를 붙들고 "이눔의 자슥이 이렇게 컸구나!" 했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 "이눔의 자슥"을 수도 없이 반복하였다. 급기야 밀짚모자에 감춰진 까까머리를 발견하고는 공부하러 절에 들어갔다더니 중이 되어왔다며 펄쩍 뛰었다. 산속 생활에 이발할 곳도 없고 긴 머리칼이 귀찮기만 하던 차에 찾아온 친구가 면도칼로 밀어서 그렇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고모 눈에는 그냥 까까중이었다. 초라한 행색에 기가 막혀 놀란 가슴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공부하러 절에 들어갔다며." 하는 고모의 표정이 살짝 묘했다.
그때 나는 고시를 세 번 낙방한 뒤였다. 그 사실을 고모가 모를 리 없었다. 고모는 어쩌면 내 모습에서 아버지의 총기를 찾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보다 못한 내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을까. 불현듯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의 넋두리가 단순한 반가움의 표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속에 실망의 빛이 배어있을 것만 같았다.
내 안부를 묻는 아버지의 짧은 편지가 딱 한 번 왔었다. 산속에 있는 5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거듭되는 낙방 소식에 아버지도 초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지에는 내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만 들어 있었다. 집 일이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다섯 번의 낙방 끝에 나는 마침내 하산했다. 나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표정에 옅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고시 낙방 때문이 아니었다. 내 혼사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남자들 결혼 평균 연령이 30세가 안 되었다. 여자들은 25세만 넘으면 노처녀 소리를 들을 때였다. 나 역시 삼십을 막 넘길 시점이라 갈등이 왔다.
"니도 벌써 장가갈 나이가 되었네. 동생들도 있고…."
아버지는 한숨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공직 경험 쌓는 건 어떻겠노?"
울고 싶은데 뺨 맞는 기분이었다. 내 고집은 이미 꺾일 대로 꺾여 있었다. 바로 그해 국가행정직 7급에 응시했다. 이듬해 발령 나 그 후 30년 동안 공직에 머물렀다. 그 생활을 마감하고 몇 년 전 4급으로 정년퇴직했다. 아버지처럼 나 역시 꿈을 온전히 펼쳐 보지 못한 채였다.
아버지의 학창 시절 친구 한 분이 있었다. 당시 대구에 있는 어느 대학교 학장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내 이름까지 지어준 분이었다. 내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지금의 아내와 학장실로 그분을 찾아갔다. 아버지의 존함을 말했다. 그분이 반색하더니, 금방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전쟁 바람에 아까운 사람 하나 배렸다. 아버지가 못다 한 꿈을 자네가 이루어주었으면 싶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결국 그분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바람은 한갓 공염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공직기간 내내 타향으로만 돌아다녔다. 고향 땅에 정착한 것은 퇴직 후의 일이었다. 부산에 오기 전, 어릴 적 우리 가족이 살았던 달성공원 뒤 대신동을 찾아갔다. 사라진 골목과 달라진 거리에서 향수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서문시장 어머니의 포목점 자리를 어림해 보았다. 2지구인지 4지구인지 쉽지 않았다. 빚쟁이에게 대들었던 기억만은 선명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지.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를 보호해야겠다는 무의식적 보호 본능이 발동했지 싶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문시장에 불이 났다
어머니 포목점이 타고 아버지 사업도 망했다
빚쟁이들 밀려들어 여섯 식구는 뿔뿔이 헤어졌다
아버지 따라 나만 부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자갈치 시장 난전에 퍼질러 앉아 영도다리 쳐다보며
아버지는 소주를 마시며
좋은 시절이 올 거라고 말했다
고래고기를 왕소금에 찍어 넘기던 내 귀에는
아버지의 그 말이 뱃고동 소리처럼 처량하게 들렸다
내가 태어난 고향도 뱃고동 소리가 되어 멀어져 갔다.
1년 만에 가족이 합쳤다
바다가 보이는 산언덕 달동네였다
고달픈 장남의 인생
가도 가도 계속되는 가시밭길이었다
공동변소 긴 줄 앞 양지바른 곳에 핀 제비꽃
행복은 반드시 온다는 꽃말
그 말 전해 주기라도 할 듯
나를 보며 소담스럽게 웃었었다
반세기를 돌고 돌아서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행복을 기약하던 그 꽃이 베란다 화단에 피었다
아버지가 와 계신 줄 알았다." (김병우, '제비꽃)
내가 대전 연구단지 아파트에 살 때였다.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에 넓은 운동장이 하나 있었다. 사시사철 운동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어느 이른 새벽에 아버지와 그 운동장에 갔다. 운동장을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뒤따라오던 아버지가 안 보였다. 화장실에 가셨나 싶었으나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저만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아침에 무슨 일이지 싶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 둥근 원이 만들어졌다. 그 한가운데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아버지가 왜 저기에. 이 사람들은 또 무언가. 머리가 혼란스러웠으나 곧 의문이 풀렸다. 아버지가 하는 무술을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이었다.
공중을 향해 내지르는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눈에서는 광기가 뻗어 나왔다. 간간이 손뼉을 치는 사람, 원더풀 응원을 보내는 외국인의 목소리도 들렸다. 무술과 구경꾼이 어울려, 시골 장터 약장수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손과 발놀림은 30여 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동작 하나하나가 구경꾼들에게는 신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허공을 향해 밀고 당기는 연속 동작에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온몸이 석고상처럼 단단해지다가도 허물처럼 무너져 내렸다.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이 무술에 심취한 아버지를 붉게 물들였다.
저 정도 무술을 하려면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언제부터 하셨을까? 그때 내 나이 막 사십 줄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버지는 육십 중반을 넘긴 지금의 내 나이인 셈이었다. 어쨌든 내가 모르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얼마동안 배운 거냐고. 숨 가쁜 내 질문에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걷기만 했다.
"어느 절에서 배운 춤이란다."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춤이라니? 절에서 배운 춤이라면 신선놀음하듯 추어야 하는 게 맞다. 속세를 떠나 학처럼 고고하게 살아가는 삶이 표현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버지의 춤은 상대의 허를 노리는 야릇한 춤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비수라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신기해했다. 나에게는 왠지 익숙해 보였다. 내가 군대 시절 신물이 나도록 훈련했던 총검술과 너무도 똑같았다. 아버지의 춤은 그 총검술 16개 동작의 기본 흐름이었다. 그 춤에는 당신이 겪었던 전투 장면이 은연중에 투영되었으리라. 피아가 구별 안 되는 한밤중의 백병전,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적의 눈과 마주쳤을 때의 불꽃 튀기는 그 눈빛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가 되기 위해 내가 미국으로 가려고 했을 때 불같이 화를 내던 아버지의 바로 그 눈빛이기도 했다.
※2022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 논픽션 '부운' 5편은 다음주 화요일(2일)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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