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은 일제강점기 시절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왕산 허위,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이육사, 이상화, 박희광, 이인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보훈학적 관점에서 대구경북을 빛낸 대표적인 여성 독립유공자를 소개하자면 독립운동의 거목 김락 독립운동가를 말할 수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및 공적조서에 근거해 독립운동 활동을 살펴보면 김락은 경북 안동(安東)에서 태어나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안동군 예안면(禮安面)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예안 시위는 고종 인산에 참가했던 이동봉(李東鳳)·이용호(李用鎬)·김동택(金東澤)·신응한(申應漢) 등이 서울의 시위를 직접 보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면서 계획이 추진되었다.
예안 시위는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시위는 3월 17일에 발생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오후 3시 30분경 3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시장 주변에 나뉘어 있던 3개의 시위대 100여 명이 일제히 시장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시위대는 미리 정보를 탐지하고 수비대까지 동원한 일본 경찰의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동봉의 인솔하에 예안 주재소로 몰려갔다. 그러나 주동자를 비롯한 15명이 체포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위 군중들도 해산하였다.
그런데 오후 6시쯤, 격분한 시위 군중들이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몰려왔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1천5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구금자를 탈환하고자 돌멩이와 기왓장을 던지면서 주재소로 밀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다시 25명이 붙잡혔다.
그러나 예안 시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3월 22일 다시 2차 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7시부터 약 2천 명의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동부동과 서부동, 선성산 위에서 무리를 이루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발포로 13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붙잡혔다.
김락도 예안의 3·1운동에 참가하였다. 김락은 이 일로 붙잡혀 신문 과정에서 받은 고문으로 인해 두 눈을 실명하여 고통 속에서 여생을 마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락은 자정(自靖) 순국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며느리이자, 1919년 '파리장서' 운동의 주모자로 활동하다가 순국한 이중업(李中業)의 부인으로, 온 집안이 독립유공자 명문가 집안으로 김락의 역사적 재평가와 명예 선양 방안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를 위한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첫째, 김락 지사의 생가 복원 및 기념관 설립으로 시민과 학생들의 견학 및 보훈교육의 랜드마크로 적극 활용하고 둘째, 김락 지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재평가 및 보훈 학술세미나 개최로 보훈 선양을 활성화하며 셋째, 김락 지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 공연이나 음악회, 영화 제작 등으로 대국민 홍보를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여자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해 일본의 온갖 고초에도 변절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평생을 몸 바치고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김락 선생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지역의 영웅이므로 우리는 이분의 나라 사랑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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