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시대라는 새로운 역사의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가 국정과제로 표방되면서 사는 곳의 차이가 기회의 격차로 이어지는 불평등이 공론화되었다. 이에 여러 분야에서 서울 쏠림 – 지방소멸의 악순환을 끊어내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전 정부에서도 다양한 국토 균형 발전 계획을 추진했지만, 지방시대의 실현은 쉽지 않았다. 지방시대는 지방이 스스로의 힘으로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할 때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방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을 퇴계혁명에서 발견한다. 16세기 퇴계의 서원 운동은 지방이 앞장서서 서울로 쏠리던 국가의 자원과 인재를 지방으로 되돌려놓은 거대한 사회혁명이었다.
퇴계혁명에는 '인간으로서, 지방민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경상도 안동의 지방민 퇴계의 정체성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또 퇴계혁명에는 강남 농법이라는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존중, 종가문화를 통한 지방 쾌적성(어매니티)의 개선, 사제공동체의 광역 네트워크를 통한 관계 인구의 확대, 향약 개혁을 통한 지역 내의 민주적 의사소통 등 지방시대 성공의 보편적인 공식이 적용되고 있다.
퇴계혁명은 책을 읽고 생각한 논리적 구상이 아니라 퇴계 자신이 실존적 체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결단한 운명적 선택이었다.
1546년 7월 퇴계의 두 번째 부인 권 씨가 죽었다. 처녀 시절 신사무옥으로 숙부 권전이 곤장 170대를 맞다가 형틀에서 죽고 부친 권질이 유배된 뒤 충격을 받아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권 씨였다. 그녀와의 16년 결혼생활은 퇴계에게 서울로만 쏠리는 권력의 각축과 그 불합리에 대한 긴 명상의 시간이었다.
1549년 8월 퇴계의 넷째 형 이해가 죽었다. 7남매의 막내였던 퇴계에게 넷째 형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이해는 충청 관찰사였을 때 역적을 비호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그는 온몸에 피고름을 흘리며 끌려가다가 결국 미아리에서 쓰러져 객사했다.
이에 12월 풍기군수 퇴계는 사직이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여 귀향했다. "나의 소원은 세상에 착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라는 시에서 퇴계의 당시 심경이 드러난다.
퇴계는 고향에 방 한 칸짜리 서당을 짓고 훗날 서원 운동으로 불리게 될 놀라운 혁명을 시작했다. 서원이란 성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그 지방 출신의 성현을 배향하는 사당을 짓고 그 옆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는 학문 공간이다.
서원 운동은 교육의 중심을 성균관과 향교 같은 관학에서 지방의 사학으로 옮겨놓았다. 학문을 서울과 연결되려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출세의 수단(위인지학)에서 지방에 뿌리박으려는, 자기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수단(위기지학)으로 바꿔놓았다. 그 결과 서원을 중심으로 유능한 인재들이 모이고 인구가 늘었으며 지방 경제가 번영했다. 여기에는 네 가지 성공 요인이 있다.
첫째는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존중이다.
성리학은 철학이지만 오늘날 대학의 철학과에서 가르치는 분과학문(사이언스)의 철학은 아니다. 성리학은 천문학, 의학, 토목학, 건축학, 농업기술이 결합된 통합 대과학(에피스테메)의 철학이다. 퇴계의 성리학 역시 첨단 농업기술인 강남농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강남농법은 3모작 논농사를 할 수 있는 중국 복건성, 절강성 지역의 농업기술이다. 이 기술은 정교하게 퇴비를 사용하는 시비법과 '천방'이라는 보를 쌓아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천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은 강남농법을 일찍 도입했지만 강우량이 부족한 자연환경 탓에 실패를 거듭했고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기술개발에 이를 수 있었다.
퇴계와 그 제자들은 강남농법을 몸소 실험하는 지방의 중소지주들이었다. 퇴계는 1548년 상습 가뭄 피해지역이었던 단양의 군수로 대규모 인공저수지 복도소를 직접 건설한 바 있다. '도를 회복하는 저수지'라는 복도소(復道沼)의 이름처럼 지역의 관점에서 퇴계가 생각한 도는 만백성이 먹고살 수 있는 길, 건실한 일자리 창출의 길이었다.
둘째는 지방 쾌적성, 어매니티의 개선이다.
어매니티란 지방에서도 서울 같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의료, 보육, 교육의 쾌적성을 말한다. 서원에서 길러진 성리학자들은 지방의 의료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성리학자들은 <향약구급방>과 같은 의서를 판독할 수 있는 유의(유학자 의사)들이었다. 영주의 초당 이석간, 안동의 탁청정 김유, 성주의 묵재 이문건, 선산의 송당 박영 등은 현대에도 연구되는 명의들이다.
서원과 함께 나타난 종가문화는 보육과 교육을 일신했다. 부모가 아닌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는 격대 보육, 효와 예절, 보양을 담당하는 안채 교육과 권학을 담당하는 사랑채 교육의 분리 등은 지방에서 서울을 능가하는 생활문화를 창조하게 하였다.
셋째는 관계 인구의 확대이다.
지방을 살리는 것은 정주 인구만이 아니다. 관광, 교육을 통한 체류 인구, 교류를 통한 관계 인구는 지역 소비력을 증진시킨다. 금난수의 <성재일기>가 말해주듯이 퇴계의 서원 운동은 공부 모임인 수계회, 관광 모임인 유산회, 창작 모임인 문회, 향음주례 등 다양한 조직을 낳았다. '통문'이라는 공유 문서를 통해 전국 각지의 사제공동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광역 네트워크를 창출했다.
넷째는 지역 내 민주적 의사소통이다.
퇴계가 생각한 이상 정치는 철저히 지방을 위한, 지방에 의한, 지방민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였다. 퇴계는 주나라의 고대 향법을 근거로 같은 지역 사람들은 서원이나 향당 같은 지역 모임에서 귀천을 가리지 말고 나이순으로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너무 급진적인 사상이었기에 월천 조목과 후조당 김부필 같은 애제자까지 반발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역 내의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관철시킨 퇴계 사상은 지역공동체를 결집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결집된 지역의 민심은 중앙에서 '사림의 공의'로 존중되었다.
퇴계혁명은 대구 경북이라는 한 지역을 떠나 모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지방시대의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그것은 평화로운 무혈혁명인 동시에 이후 한국의 기초를 형성한 근본 혁명이었다. 문화의 힘으로 새로운 국가를 창조했던 그 영광의 시대를 다시 보고 싶다.
소설가 이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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