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반가운 만남

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냉장고가 배달되어 왔다. 반가웠다. 밖의 열기를 견디느라 상기된 얼굴을 보는 순간 미처 시원한 음료조차 준비 못한 자신을 나무랐다. 기사님은 설치할 위치를 확인하고, 냉동실의 음식물들을 꺼내는 일들을 능숙하게 도와주었다.

이미 냉기를 잃어버린 냉장실은 며칠 방치된 상태로 이끼처럼 푸른곰팡이 꽃이 보인다. 벌써가 아니다. 손꼽아보니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냉장실 깊숙이 차곡차곡 쌓인 떡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와 지인들이 싸준 음식들이 꽁꽁 언 채로 나왔다. 꺼낼 때마다 기억들이 외마디를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물 반찬을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 동생이 삶아준 채소들이 튀어나오고, 갑자기 고기 먹고 싶다고 할 아이들을 위해 쟁여 둔 고기들이 나왔다. 문득 따뜻한 온기와 정성스러운 마음들이 내게로 와 저렇게 얼려진 채로 외면된 것은 아닌지 살피게 된다. 바쁜 이삿짐 정리로 그대로 냉동실에 들어와 있는 이사떡처럼 바로 전하지 못한 감사의 마음들이 무거운 차용증처럼 덜컥 마음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물건들은 그저 물건이 아니라 서로에게 전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었다. 배고플 때를 대비해서 채워놓은 냉장고처럼 우리는 마음의 허기를 채우느라 이처럼 추억들을 쌓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여전히 반짝이는 표면을 지닌, 10년 전에는 최신형이었던 냉장고와 이별을 해야 한다. 폐기 판정을 받기까지 힘든 과정이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출장서비스를 받으려면 대기자가 많아서 15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냉장고 출장서비스를 받는데 그렇게 기다려야 하나요? 이삼일 정도면 가능할 줄 알았어요. 국민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S사가…"하고 싶은 무수한 뒷말을 애써 삼켰다. 항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이다. 전화를 받는 이는 또 무슨 죄인가? 대기자가 많아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안내자의 말에 그저 망연자실했다. '냉장고 없이는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삶이었다니…' 상해가는 음식들이 걱정이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냉장고나 에어컨은 이 더운 날에는 빨리 고쳐주어야 하지 않을까? 보름이라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자만의 생각들이 오갔다.

다시 무언지 모를 설움에 목이 메어서 한 번 더 부탁한다. "조금 더 일정을 당겨 주실 수는 없을까요?" 간절함이 통했는지 연락을 드릴 테니 기다려 보라고 한다. 보름의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수리하러 온 기사님들은 냉장고의 폐기 결정을 내렸고, 냉장고를 사기까지는 또 며칠이 흘렀다. 출장서비스의 예약 날짜와는 다르게 새 상품은 빠르게도 배송되었다. 땀을 흘리며 묵묵히 설치하는 기사님의 휴대폰에 아이와 아내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이 더위에 나처럼 출장서비스를 기다리며 상해가는 음식 앞에서 발을 구르는 노인들은 없는지 갑자기 걱정이 앞섰다. 나처럼 다그치지도 못하고 그저 착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이 더위를 견디고 있지 않을까? 옛날 동네의 '소리전파사'나 '무엇이든 고쳐 드립니다'라고 써둔 친절한 간판들은 가까이서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지탱해 주었다. 세련되게 분화된 이 구조 안에서도 그런 따스함을 지킬 방법은 없을까? 미리 바쁜 철을 피해 냉장고 사전 점검도 해주고 출장서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마실 물이라도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를 전할 수 있는 이웃이 필요하다.

설명할 수 없는 아픔과 걱정이 새 냉장고와의 반가운 만남 앞에서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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