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당신이 치렀던 전쟁에 대해 내게 한 번도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침묵을 깬 것은 아버지의 몸이 보인 반응이었다. 무슨 악몽에 시달렸는지 한밤중에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두 손을 천정으로 쳐들었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괴성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의 몸이 뻣뻣했다. 아버지는 무의식적으로 어느 전장에 가 있었다. 무의식이 아버지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대구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1968년 3월부터 부모님은 줄곧 그 달동네에 살았다. 한차례 이사를 했지만, 여전히 그 달동네였다. 자식들은 장성하여 학교나 직장을 따라 떠났다. 그러나 두 분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근 오십여 년 동안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식들이 아파트로 옮길 것을 여러 번 권했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했다. 시내보다 공기가 좋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핑계였다. 자식들이 성장한 공간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게 이유였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1층 건물이었던 집을 3층으로 개조하여 방이 3개 더 늘어난 정도였다.
아버지의 칠순 잔치 때였다. 나는 형편이 안 되어 예식장은 못 빌렸다. 대신 동네 회관을 헐값에 빌렸다. 준비한 음식과 밴드 음악에 맞춰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아버지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손님들을 향해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온 건 천운이었심더. 오래전에 돌아가신 청상과부 어머니의 외동아들 사랑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더."
전쟁 중에 용케 살아온 데 대한 감사의 인사말이었다. 그러나 할머니 때문에 탈영병이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천추의 한이 된 탈영병이란 단어 하나가 아버지의 전 생애를 왜곡시켰지만, 그 단어 속에는 전쟁 영웅의 찬란한 업적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할머니의 모정도 깊게 배어있을 터였다.
그러나 국가는 이 모자지정을 법의 잣대로 평가했다. 전쟁 영웅의 업적과 사연이 서려 있는 탈영과의 경중을 비교해서 따졌다. 국가가 내린 결정에 아버지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이 역사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두 해가 지났다. 한 많은 92세의 삶이었다. 마지막 3년은 요양원에서 보냈다. 갑자기 치매가 왔다. 집에서 어머니 혼자서 간병하기가 힘들었다. 부득이 요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치매가 오기 전에는 오랫동안 시조창(時調唱)을 했다.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한을 풀어 보려는 듯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래서였는지 각종 대회에서 장원을 많이 했다.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그토록 시조창에 빠지도록 하였을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노익장을 과시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대한시조협회 부산지부 명예회장 직함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시조창에 취미 이상으로 몰입한 결과였다.
나는 아버지가 출전하는 경연장에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아버지가 어떤 대회에서 무슨 상을 받았는지는 간간이 어머니를 통해서 들었다. 받은 상금이 얼마였는지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창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 왔을 때였다. 아버지는 새벽잠이 없다 보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운동하러 가겠다고 우겼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가 걱정되어 내가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인근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운동장 구석에 있는 팔각 정자가 아버지의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그리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정자에 올라서는가 싶더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발성 연습을 잠시하고 본격적인 시조창에 들어갔다.
'세상공명(世上功名) 부운(浮雲)이라 강호어옹(江湖漁翁) 될지어다'로 시작하여 '애내곡(欸乃曲) 부르면서 달을 띄고 돌아오니 세상 알까 두렵다'로 끝나는 사설시조였다.
아버지는 점점 새벽안개에 묻혔다. 그 속에서 한 소절 한 소절 휘어지게 읊는 소리가 길게 나아갔다.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울림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당신이 걸어온 순탄하지 못했던 인생사를 떠올려서였는지도 모른다. 6‧25 전쟁, 학도병, 군사재판, 인생의 낙오자……. 그 꼬리표들이 마치 한풀이 하듯 창 소리에 녹아들었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시조창에 혼신의 힘을 쏟았는지 알 듯했다.
아버지가 요양원 가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너거 아버지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 애지중지하던 책을 잃어버리고부터 식사도 거르고……."
잃어버렸다는 책은 '시조창 악보'였다. 아버지께서 손수 기술한 책이었다. 나도 그 책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깨알 같은 연필 글씨로 꾹꾹 눌러서 쓴 그 책에는 아버지 혼이 담겨 있었다.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을까.
평소 아끼던 책을 분실하고부터 아버지에게 치매가 왔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는 요양원 생활 중에도 잃어버린 책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시조창을 같이 했었던 아무개가 그 책을 훔쳐 갔다. 그런데 본인은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책에 대한 집착을 끝내 못 버렸다. 죽음 앞에서 그게 뭐라고 그토록 내려놓지 못하였을까.
잃어버린 시조창 책은 아버지에게 부적 같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은 당신의 전쟁 상흔을 치유하는 주술 도구였다. 책을 찾지 못한다면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갈지도 모른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아버지는 요양원에서도 시조창을 흥얼거렸다. 간혹 정신이 맑은 날, 먼 산을 바라보며 창을 했다.
아버지는 전쟁이 휩쓸고 간 황량한 터에 뿌리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라는 나무는 병약했다. 봄이 와도 잎다운 잎을 피우지 못했다. 자식이라는 가지도 신통찮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한 아버지의 삶은 곧바로 우리 가족이 걸어가야 할 운명이 되었다.
군 장교가 되고 싶었던 아버지. 아버지가 바랐던 군문으로 내가 들어갔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런지 내 마음속에는 아버지가 안장되어 있다. 호국원에 가고 못 가고 가 무슨 상관인가.
양구 문등리는 지금 휴전선 이북에 있다. 아버지는 문등리 남쪽 단장의 능선에서 적의 기습에 당한 것일까. 아니면 피의 능선 851. 931, 894고지 중 어느 고지 쟁탈전에서였을까. 이 뭉툭한 의문도 세월에 희석될 것이다.
아버지가 술김에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마지막 전투에서 아버지가 속해 있는 부대 전원이 전사했다며 폭음을 했다. 살아 있음에 대한 죄책감, 머리를 욱신거리게 하는 탄피. 살벌했던 군사재판 등 온갖 것들이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했다. 아버지는 평생 사라진 전우들과 함께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 역시 그때 희생됐던 아버지의 전우들을 떠올려 본다. 그 전우들이 없었더라면 아버지가 살 수 있었을까. 아직도 산골짝 어디에 묻혀 있을 유골들. 원혼이 되어 산등성이를 서성이지나 않을까. 그 원혼들을 위해 삼가 한잔 술을 올리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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