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는 화가들도 간혹 종이작업을 한다. 평소 그릴거리를 구상하는 스케치나 드로잉을 넘어 종이를 정식 매체로 활용하는 것이다. 서양화가 장욱진에게는 화선지나 한지에 먹으로 그린 먹그림과 여러 색 매직으로 종이에 그린 매직그림이 있다. 합죽선 부채에 그린 '산천풍경'은 매직그림이다.
장욱진은 땅, 물, 하늘이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산천풍경'의 세계는 원경, 중경, 근경이 뚜렷한 산수화적 공간이다. 멀리 꼭대기에 정자가 있는 산줄기 사이로 새들이 날고, 가운데는 배 한척이 떠 있는 강이 있으며, 오른쪽 근경은 주황색 선으로 땅을 표시했다. 언덕 위에 초가지붕 정자 하나, 인물 하나,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를 그리고 '1978, Ucchin,C'으로 서명했다. 정자 앞의 뒷짐 진 남자는 작가 자신이다. 나무에 올라앉은 새도 작가와 시선을 함께 하며 멀리 바라보는 품이 마치 반려 새 같다.
1978년은 장욱진의 화실이 서울 명륜동 자택에 있을 때다. 장욱진은 1960년대부터 서울을 떠나 인연이 닿는 시골에 화실을 마련했다. 1963년부터 한강 상류인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에서 살며, "촛불의 그 맛과 멋의 극치"라며 촛불 아래서 그림을 그렸다. 덕소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길이 닦이자 강에서 자갈을 채취하고 분쇄하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장욱진은 12년 덕소 생활을 청산하고 1975년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골로 갈까 망설이던 중 뒷집을 우연히 사게 돼 화실로 고쳤고 우물자리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관어당(觀魚堂)이라고 했다. 볏짚 이엉을 인 초정(草亭)이었다. 1970년대 중반 종로구 주택가에서 초가지붕을 관리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옛 산수화에 나오는 초정의 운치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굳이 그랬을 것이다. 그림 속 초정은 곧 관어당이고, 화가는 강가에서 멀리 양수리를 바라보던 덕소시절을 그리워한다.
장욱진은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라고 했던 시골주의자였다. 명륜동에 살 때 도시살이의 답답함을 자주 시골로 다니며 풀었는데, 여행길에 매직펜이나 사인펜으로 스케치북에 간편하게 그렸던 것이 매직그림으로 발전했다. 서울생활의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서울이 한창 싫어질 적에 이곳에 집이 하나 났다는 소식"에 보지도 않고 계약한 것이 수안보온천 뒷동네인 탑동리였다. 1980년 봄, 이 농가를 고쳐 화실로 쓰며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
장욱진은 "우리강산은 능히 자랑할 만하다. 나도 둔감(鈍感)이기는 하나 산수를 즐겨 그리곤 한다"며 자신의 풍경화를 스스로는 우리강산을 그린 산수화로 여겼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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