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피소드로 읽는 전쟁 톡톡] 칼레전투의 유산, 노블레스 오블리쥬

로댕의 작품인
로댕의 작품인 '칼레의 시민'

몇 해 전, 필자는 프랑스 북부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지인의 안내에 따라 프랑스,독일. 스위스 문화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문화적 풍경화 같은 아름다운 프랑스의 북부, 알자스 로렌 지방을 몇 일간 여행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파리로 향했다. 가장 먼저 예술의 도시 파리의 거리를 향유하고 싶었던 나머지 로뎅미술관을 찾았다. 파리 시내의 번화가에 자리한 로뎅미술관은 세계인들로 붐볐다.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나는 백여 년 전의 로뎅과 은밀한 대화라도 나눌 듯 괜히 설레었다. 전시실과 넓은 정원을 갖춘 로뎅미술관의 가운데 뜰 앞에는 어귀스트 로뎅(1884~1895)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이 세워져 있다. 미술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 불후의 명작 앞에서 세계인들이 한참 눈길을 멈춘다.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관람객들은 정원 동쪽에서 또 다른 하나의 군상, '칼레의 시민' 앞에서 걸음을 머뭇거린다. 부드러운 조명이 내린 전시실 안에서 다양한 로뎅의 작품을 보던 심미안과는 사뭇 다른 눈빛들이다. 어깨와 팔이 밧줄에 묶인, 자유롭지 못한 몸과 표정의 청동 주조 조각품인 '칼레의 시민'을 마주하고 있으면 첫눈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1337년 5월부터 116년 동안 단속적(斷續的)으로 기나긴 전쟁을 했다. 세간에 알려진 백년전쟁이다. 당시 영국은 자국과 마주 보고 있는 프랑스의 북부 해안 도시 칼레를 프랑스 침공의 전진 기지로 선택했다. 전쟁은 치열했다. 칼레 시민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고 1년 동안이나 죽음으로 맞섰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앞섰던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1346년 9월, 드디어 칼레시를 점령한다. 칼레 시가지가 불에 타들어 가고 시민들이 모두 학살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에드워드 3세는 지리한 전투에 질려 칼레의 시민 모두를 참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레 시민들의 끈질긴 저항에 한 발짝 물러선 듯 기막힌 다른 조건을 내건다.

"칼레 시민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인사 6명을 뽑아 보내라. 시민을 대신하여 그들을 처형할 것이다."

칼레 시민들은 새로운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6명의 시민을 골라 죽음의 장으로 보내기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불안한 마음과 함께 시민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내가 나서겠소."

가장 먼저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자원하였다. 그는 칼레 시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최고의 부자였다. 소문이 삽시간에 도시 안으로 퍼져나갔다. 하루 이틀 지나자 그 뒤를 이어 칼레시장, 법률가 등 칼레의 소문난 부자들 6명이 연이어 희생을 자처하며 나섰다. 그들은 스스로 목을 묶어 허름한 자루 옷을 걸치고 영국 왕 앞에 나왔다. 하나 같이 칼레시민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던 것이다. 곧 처형될 그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만삭의 영국 왕비 에노의 필리파가

"내 뱃속에 장차 왕손을 이어나갈 아이가 있소. 이 사람들을 죽인다면 이 아이에게 결코 좋지 않을 겁니다."

"......"

에드워드 3세는 그 말에 결국 처형을 멈춘다. 결국 용기 있는 6인의 칼레 시민은 극적으로 풀려나게 되고 이들로 인해 모든 칼레 시민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칼레시는 로뎅에게 그 전설 같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조각상으로 만들 것을 의뢰한다. 칼레 시민을 대신해서 스스로 영어의 몸이 되어 죽음의 행진을 하는 위대한 6인의 모습을 예술작품으로 영원히 남게 한 것이다.

로뎅은 시민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작품 속의 인물들을 자랑스럽고 위엄 있는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내지 않았다. 형틀에 갇힌 무겁고 우울한, 공포와 고통스러운 포로의 얼굴로 묘사하고 있다. 로뎅은 죽음에 직면한 그들의 숙명과 반항과 슬픔 등 복잡한 감정을 솔직하게 그리려 했다. 작가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에서 위대함을 보려했다. 시대를 앞서간 로뎅은 여섯 의인들의 외형 보다 심리적 정직성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곧 진정한 칼레 시민의 희생정신이라고 믿었기 때문 아닐까.

그후 '칼레의 시민' 상은 사회 지도자층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표상으로 전해진다. 프랑스의 칼레 전투에서 보여준 그 여섯 시민의 용기 있는 행동은 그야말로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이요 실천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칼레의 시민'은 다만 조각상을 넘어 국민의 자부심과 아울러 시민의 한 사람인 지도자의 자기 책임을 부각하는 의미로 고착되었다.

사실, 나라와 지역의 위기를 행동으로 지키겠다는 시민정신은 개인적인 영웅심을 넘어 확실한 사회적 공유자산임이 분명하다.

김정식
김정식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