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깎아 줄 수는 없나요?"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동맥판막 협착증으로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서 쉬어야 했던 할머니는 시술비용이 3천만원이 넘는다는 말에 치료를 미루다 아들 손에 이끌려 병원을 다시 찾았다. 치료 비용을 설명드리자 부담이 되기는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의 체면을 지켜주느라 입을 다물고 있던 할머니는 아들이 잠시 상의해 보겠다고 진료실 밖으로 나간 사이 애원하듯 물은 것이었다. 대학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은 어지간한 비용은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으나 때로는 거액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진료 후 진료비가 적정했는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문의를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과연 '적정진료'란 무엇일까?
의료현장에서 소비자인 환자가 공급자인 의사를 상대로 가격을 흥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기 힘든 장면이다. 왜냐면 환자가 어떤 검사 또는 치료가 꼭 필요한지 아닌지를 전문가인 의사의 자세한 설명 없이는 알아낼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용이 많이 드는 검사라고 하더라도 의사의 권유에 따라 검사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의사가 권유한 검사의 정확도가 검증되어 있어서 환자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다면 고비용의 검사라도 환자는 쉽게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검사는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의사가 꼭 필요한 검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검사에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것이다. 미국에서는 '과잉 진료'로 생각되는 경우가 전체 의료비용의 30%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
최근 서구 의료에서 이런 '과잉 진료'가 환자와 의사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주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의료인 전문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현명한 선택'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현명한 선택'은 의사가 자발적으로 환자에게 꼭 필요한 처치가 무엇인지를 결정하여 불필요한 진단이나 검사, 치료 등을 줄이자는 운동이다. 이 캠페인은 2000년대 미국내과의사재단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으며 환자들이 선택하는 의료 행위 및 치료가 ▷증거 기반이고 ▷이전에 시행된 다른 의료 행위와 겹치지 않고 ▷해롭지 않고 ▷필수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과잉진료'를 막아 의료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나라도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을 중심으로 17개 전문의학단체가 참여하여 불필요한 검사나 치료에 해당하는 항목들을 지정하고 있고 2022년을 '현명한 선택' 시작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의료비용 측면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한국의 의료 환경에서 '한국형 현명한 선택'이 시행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이 많다. 우선 전문의학단체들이 '현명한 선택'을 위하여 열거한 불필요한 검사들의 여러 항목에 대해서 개개의 의사들의 동의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의료비가 상대적으로 싼 한국에서는 검사를 시행하지 않아 환자에게 오진을 했을 때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검사를 시행하더라도 환자의 병을 진단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현저히 높다는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상황은 모처럼 전문가 단체들이 나서서 자발적으로 '현명한 선택'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 운동의 결과물로 정한 불필요한 검사의 항목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급여 적용의 기준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형 현명한 선택'이 성공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장훈 경북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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