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지 않게 살다 간 한 무명의 사진가가 있었다. 집도 가족도 유산도 없이 떠난 그가 유일하게 남긴 건, 한 임대 창고에 쌓여 있던 14만 장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필름뿐이었다. 생전 그는 남는 시간이면 언제나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거리로 나가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현상할 형편이 안 돼 대부분 필름 상태로 보관했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
2007년 경매로 나온 그의 필름박스를 단돈 400달러에 사들인 한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구입한 필름 몇 장을 현상해본 그는 범상치 않은 예술성에 놀라 사진을 SNS에 올린다. 빈부·특권·젠더·인종·정치·죽음 등 묵직한 주제가 투영된 따뜻하고도 날선 사진들. 전 세계 사람들은 앞다퉈 '좋아요'를 누르기 시작했고, 언론은 일제히 이 무명의 사진가에게 매료돼 기사를 쏟아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세를 탄 그의 사진은 세계를 순회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고, 그의 독특한 인생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2015년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사진가' 반열에 오른 비비안 마이어 이야기다.
하지만 사진의 주인에게 다가갈수록 더 많은 비밀과 의문이 쌓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자랐고, 뉴욕과 시카고에서 보모로 일했으며, 극히 제한된 인간관계를 맺었다는 것 외엔 도무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가장 친한 지인이나 고용주도 그의 기본적인 가족관계나 성장 배경에 대해 알지 못했고, 어떤 이는 자신의 보모에게 카메라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이처럼 미스터리한 작가의 삶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긴 채 끝을 맺는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그 이후의 이야기다. 지은이는 창고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 가운데 비비안의 흔적을 쫓을 수 있는 단서를 찾고, 프랑스 시골 마을과 뉴욕 문서 보관소를 뒤져 어쩌면 작가가 평생 숨기고 싶었을 그 집안의 가계도를 완성한다. 치밀한 연구와 끈질긴 추적 끝에 지은이는, 그가 무심하고 냉담한 겉모습 뒤에 지성과 연민과 영감으로 가득한 인물이 있었고, 자신의 작품을 금세기 사진 분야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만들 창조적이고 진지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480쪽, 3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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