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일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전화하는 모습도, 인체 내장형 칩이 상용화된 미래엔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수 있다.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에겐 증조할아버지뻘인 1930년대 남학생의 평범한 일상도 2022년엔 큰 가치를 지닌다.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발굴하는 이들은 언제나 존재해왔으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대구교육박물관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1930년대 대구 지역 고등학생의 일기장을 번역한 '남학생일기'를 펴냈다.
◆ 안장호 군의 일기 6권에서 탄생
이 일기의 주인공은 1932년에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이하 대구고보)에 입학해 1937년 졸업한 안장호 군이다.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에서 장호 군이 1학년, 2학년, 4학년, 5학년 때 작성한 일기장 6권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책은 6권의 일기 중 일제 강점기 당시 상황과 학교 풍경, 교육 상황 및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내용 위주로 발췌해 학년별로 구성했다.
당시 남자 고등보통학교의 학제는 5년제였기에 장호 군도 1932년에서 1937년까지 학교를 다녔다. 일기장은 3학년을 제외한 1,2,4,5학년의 학교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일기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 곳곳엔 1930년대의 한국사, 대구의 상황, 교육제도 등에 대한 설명도 함께 실렸다. 또한, 일기에 등장하는 장소나 행사에 대한 설명은 주석으로 추가됐으며 당시 신문 등 각종 시각 자료도 첨부됐다.
'남학생 일기'의 번역본은 8월 중순부터 대구교육박물관 방문객에게 무료로 배부될 예정이다. 관련 문의는 대구교육박물관 교육학예부(053-231-1753)로 하면 된다.

◆ 학교 일상과 함께 당시 지역 상황도 담겨
아쉽게도 3학년 때 일기장은 없고, 4학년 때 내용도 극히 일부지만 일기장을 통해 당시 장호 군이 어떤 과목을 공부했고 선생님들은 어땠는지, 교과 수업 외에 학교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등 학교 생활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일기에 묘사된 입학식 풍경을 통해 당시 남자고등보통학교는 3학기로 구성돼 4월 1일에 시작해 이듬해 3월 졸업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지모토 선생님이 편찮으셔서 교련은 없고 6교시만 했다. 선생님은 편찮으신데도 우리들은 실로 기쁘고 고맙게 느꼈다. 미야하라 선생님의 시간에는 자습을 했다. 이것도 고맙다"는 대목에선 선생님 사정으로 수업을 못하게 됐을 때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 외에도 '난로 위 도시락 데우기', '전교생이 함께 했던 토끼 사냥'과 같은 당시 학교에서만 있었던 이색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구역 앞 12차선 도로 개통', '미나카이백화점 개점', '대구비행장 개장' 등 당시 대구의 풍경도 녹아들어 있다.

◆ 식민지 교육의 실상도 고스란히 나타나
'남학생일기'는 지난 2018년 대구교육박물관 개관 당시 출간한 '여학생일기'와 짝을 이룬다. 그러나 '여학생일기'가 황국 신민화 교육에 순응했던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남학생 일기'에는 주인공의 현실 비판도 포함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장호 군이 고학년이 될수록 점점 심해지는 식민지 군사교육의 고달픔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도 늘어난다.
일기는 거의 매일 반복되는 고된 교련훈련, 병영훈련을 받으며 힘들어하는 모습과 일본 왕실의 기념일마다 학생들에게 신사참배 등 각종 의식을 강요하는 모습을 통해 척박했던 일제강점기 교육 환경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장호 군은 주관을 잃지 않고 학업을 이어나가는데, 이는 교장선생님 훈화를 들은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방과 후 강연에서 교장선생님은 인간의 생명보다 칙어(勅語)와 교기(校旗)를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호 군은 "생명이 중요한가, 칙어나 교기가 중요한가 생각했다. 생명은 한번 없어지면 돈을 몇억 엔 내도 또다시 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말하는 '칙어'는 1890년 10월 30일 일본 메이지 천왕의 명으로 반포된 교육칙어를 가리키며, 일본은 이를 토대로 교육 전반의 규범을 정했다. 사람의 목숨보다 이념을 중시하고 강요했던 식민지 교육 환경 속에서도 장호 군은 비판 의식을 잃지 않은 것이다.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 관장은 "오랜 시간 공들인 '남학생 일기' 번역 작업을 마치게 돼 소회가 남다르다"며 "남학생 일기를 통해 지역민들에게 또 하나의 일제강점기 대구 기록를 보여 줄 수 있어 기쁘다. 많은 분들이 공유해 후속 연구가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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