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빠나 엄마 손에 이끌려 간 '동네 목욕탕'에서 때를 밀던 기억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쏟아지고. 목욕 끝나고 사 먹는 바나나 우유는 또 얼마나 달콤한지. 이처럼 목욕탕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 목욕탕에서의 따뜻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그 모습을 재현해놓은 카페가 있다.


◆50년 된 여관 겸 목욕탕의 재탄생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3층 건물. 건물 우측에 붙어 있는 빛바랜 목욕탕 마크만이 이곳이 한때 목욕탕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랜 시간 여관 겸 목욕탕으로 운영되던 장소를 카페로 리모델링한 곳. 대구 중구 문화동에 있는 '카페 문화장' 이야기다.
'커피와 예술로 나 오늘 목욕합니다'라는 문화장의 슬로건이 적힌 현수막이 걸린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계산대가 보인다. 계산대 양쪽으로 카페를 다녀간 손님들이 남기고 간 수많은 메모가 빼곡하다. 여기까진 여느 카페와 별다를 게 없다.
오른쪽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이 건물이 품은 오랜 역사가 펼쳐지는데. 2층 중앙에 있는 옥색 타일의 대중탕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물 빠진 대중탕 안에는 평상 모양의 기다란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다. 신발을 벗고 탕 안에 들어가 둘러앉아 있으면 마치 옛날 동네 목욕탕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외에도 때밀이부터 목욕 의자, 라커룸, 미니 욕조까지, 건물 곳곳에 목욕탕과 관련된 인테리어 소품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청수장 운영 시절 지하에 두었던 녹슨 보일러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전시해 레트로한 감성을 한층 더해준다.
동생과 함께 카페를 찾은 서은주(21) 씨는 "SNS에서 핫 플레이스로 떠올라 어떤 곳인지 궁금해 찾게됐다. 욕조와 타일들이 옛날 목욕탕이랑 비슷해서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도시 재생을 통해 역사를 그대로
1970년대에 운영을 시작한 여관 겸 목욕탕인 청수장은 한때 사람들이 자주 찾는 유명한 장소였다. 친구들끼리 약속 장소를 잡을 때도 "청수장 앞에서 만나자"라는 이야기가 오갈 정도였다고.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고급 숙박시설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최신식 스파, 사우나가 등장하며 조금씩 쇠퇴기를 맞았다. 그러던 중 대구에 복합문화예술 공간을 조성하고자 모인 여섯 명의 사람들에 의해 2017년 청수장은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건축가이자 문화장의 브랜드 기획자인 박찬영(41) 부관장은 "카페와 문화 플랫폼을 겸하는 목적으로 문화장을 기획하게 됐다. 적절한 공간을 찾던 중 청수장을 발견했고 여관 겸 목욕탕을 콘셉트로 한 카페는 드물다고 생각해 이곳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이들은 도시 재생의 관점에서 건물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큰 대중탕과 객실이 있던 2층은 벽들을 모두 허물어 뻥 뚫린 오픈 공간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3층은 기존에 있던 10개의 객실과 방마다 딸린 욕조방을 그대로 유지해 독립된 공간들을 연출했다.
건물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과 천장, 벽면 등 카페 곳곳에 과거 청수장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 모습을 구현해 내기 위해 특별히 신경 썼다고.
박 부관장은 "50년이 넘은 건물이다 보니 벽지가 10겹이나 붙어 있었다"며 "200여 명이 끌(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겉면을 깎고 다듬는 데 쓰는 연장)을 이용해 벽지를 하나하나 뜯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처럼 지도 모양이 나는 예스러운 형태의 벽면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3층에 있는 누렇게 색이 변한 욕조들도 원래 청수장 객실의 욕조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작다 보니 155㎝ 길이의 아담한 욕조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풍경이 손님들에게 이색적인 인상을 자아내 문화장을 들리면 꼭 사진을 찍어야 하는 포토존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카페를 넘어선 하나의 갤러리
문화장을 단순한 카페로만 생각하면 섭섭하다. 3층의 독립된 10개의 방을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실인 '아틀리에'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문화장은 신흥 작가와 브랜드들을 선정해 방을 하나씩 내어주고 그 공간을 각각의 색깔에 맞게 꾸미도록 요청한다.
인기 작품들은 장기간 전시하기도 하고 일부 작품들은 3개월 주기로 다른 작품으로 변경하며 새로움을 더해준다. 덕분에 손님들은 커피를 마시는 동시에 갤러리에 방문한 것처럼 다양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카페를 넘어 대중과 예술가가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 잡기를 원했던 애초 문화장의 기획 목표와도 일치한다. 젊은 작가나 지역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예술적 색깔을 표출할 수 있는 장이 되어주고, 카페를 찾는 손님들에게는 문화를 향유하고 영감을 얻어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는 것이다.
경주에서 온 김아름(30) 씨는 "카페에서 수다만 떨기보다 전시장을 찾은 것처럼 여러 작품을 구경하며 예술적인 체험을 할 수 있어서 특별하다"며 "방마다 콘셉트가 달라 '여기는 어떤 공간일까' 추측하며 돌아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곳을 찾는 주요 연령대는 20~30대가 가장 많지만 가족 단위부터 나이가 있는 손님들까지 연령대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박 관장은 "요즘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힘들고 삶이 팍팍한데 그런 상황 속에서 문화장이 감성적인 힐링이 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아가 아틀리에의 작품들이 활발하게 SNS로 공유되면서 대중과 예술가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로 자리 잡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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