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언미의 찬란한 예술의 기억] 예술가들의 편지로 지역을 재발견하다

편지지에 쌓인 예술의 향기

나운영이 장영목에게 보낸 편지(1970년 9월 17일)
나운영이 장영목에게 보낸 편지(1970년 9월 17일)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먼 거리의 지인들과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던 유일한 수단은 편지였다. 특히 예술인들이 남긴 편지는 그들이 예술작품을 창작하게 된 철학과 지역과 세대를 넘나드는 교류 관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손글씨를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요즘, 예술가들의 필체를 보면 그들의 호흡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문화예술아카이브 사업을 추진하면서 여러 예술인들의 기증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편지들을 확보했다.

그 중 1970년 작곡가 나운영(1922~1993)이 대구의 합창지휘자 장영목(1934~)에게 보내온 편지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보내주신 구왕삼 선생님 스크랩 북 잘 받았습니다. 6·25 이전의 음악회 프로그램이나 사진, SP 레코드(구왕삼 선생님 것이든 뭐든) 등이 있으신지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6·25 사변에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은 대구, 부산뿐이기 때문에 주로 이 두 도시에 거주하시는 분들에게서 귀중한 음악사적 자료를 구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나운영은 '아 가을인가', '구두발자국' 등 수많은 명곡을 남긴 작곡가이자 음악학자, 장영목은 1960년대 전후 합창운동을 거쳐 1981년 대구시립합창단을 창단한 지휘자이다. 이 두 사람이 음악활동을 하며 나눈 편지가 여러 통 남아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 특히 '구왕삼의 음악자료'에 대한 내용에 관심이 갔다.

나운영이 장영목에게 보낸 편지(1970년 10월 4일)
나운영이 장영목에게 보낸 편지(1970년 10월 4일)

구왕삼(1909~1977)은 한국 사진의 전설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사진은 무성(無聲)의 시(詩), 시는 유성(有聲)의 사진'이라는 명문을 남긴 구왕삼은 경남 김해 출신으로, 1940~60년대 대구를 기반으로 사진 작업과 비평 활동을 활발히 했다. 한편 그는 일제강점기 작곡가(동요)이자 아동문학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삼천리』(1935) 등의 잡지에 음악 비평을 게재했고 「조선의 꽃」 등 여러 창작 동요를 남겼다.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대구 지역 일간지를 통해 사진 비평과 함께 음악 평론도 활발히 했다.

다시 편지 내용으로 돌아가 보면, 장영목은 1970년경 나운영의 부탁으로 대구에 있던 구왕삼의 '스크랩북'을 전달해줬다. 그 내용은 1940~60년대 신문 기고를 모은 스크랩북으로 추정된다. 장영목 지휘자가 고이 보관한 편지로 우리는 구왕삼의 스크랩북이 존재했으며, 그것이 나운영에게 전달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 스크랩북이 제대로 연구된다면, 구왕삼과 1940~60년대 대구 예술계 이야기가 풍성해질 것이 분명하다.

편지를 읽자마자 장영목 지휘자에게 전화로 관련 내용을 여쭤봤다. "구왕삼 선생님이 1970년대까지 대구에 계셨어요? 그리고 편지 내용처럼 구왕삼 선생님의 스크랩북을 구해서 나운영 선생님께 보내주셨어요?" "그래요. 나운영 선생님은 일찍부터 예술자료의 소중함을 아시고 수집하셨죠. 또 구왕삼 선생님은 심지가 강한 분이라, 예술 관련 비평을 쓸 때 친분에 얽매이지 않고 강단 있게 쓰셨어요." 장 지휘자가 건강히 계신 덕분에 이렇게 바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이 편지가 유일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한편 임우상 작곡가는 스승인 작곡가 이상근(1922~2000)을 비롯해, 대구 출신 재미(在美) 작곡가 김병곤(1927~2009)과 주고받은 다양한 편지들을 기증했다. 이 편지들을 통해 진주와 부산의 문화인물로 기록되고 있는 작곡가 이상근의 음악 철학과 대구예술인들과의 교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다. 또 작곡가 김병곤이 미국에서 고향의 음악인들을 세계무대에 소개하기 위해 힘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1950~60년대 교향악 운동에 힘썼던 대구의 음악인들이 유럽의 음악인들에게 응원을 요청했을 때, 세계적인 음악인들이 대구로 축전을 보냈다. 당시 80대였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장문의 편지를 친필 사인과 함께 보내왔다. 이화여전 출신으로 6·25 전쟁 때 대구에 정착한 피아니스트 이경희(1916~2004)가 스승이었던 선교사에게 받은 편지, 남성 1세대 현대무용가 김상규(1922~1989)가 제자들과 나눈 친필 편지들도 남아있다.

이달 16일부터 대구예술발전소 3층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 수장고에서 '예술가의 편지'가 전시된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거치며 문화예술로 도시를 일으켜 세우려 고군분투한 향토 예술인들의 생생한 기록이 담긴 편지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이 남긴 사연들을 통해 대구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재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임언미
임언미

임언미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장, 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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