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우영우’ 덕에 유명해진 팽나무

경북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천연기념물 팽나무 황목근. 나무의 나이가 많아서 가지 일부가 말라 있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천연기념물 팽나무 황목근. 나무의 나이가 많아서 가지 일부가 말라 있다.

어릴 적, 아부지의 회초리 되어

공부나 심부름에 게으른 날엔

종아리 파랗게 아프게 하고

식전부터 일 나가신 엄니 아부지

기다리다 지치는 날엔

동무보다 재미있는 장난감 되어

하루해전 무료 달래어주던

나의 선생, 나의 누이인 나무

이재무의 시집 『섣달 그믐』에 나오는 「팽나무」다. 팽나무를 정자나무로 삼고 있는 마을에서 자란 사람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시다. 아울러 시골 출신의 '촌사람' 추억을 소환해 준다.

팽나무 열매
팽나무 열매

가난하던 예전 시골 아이들에게 팽나무는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나무다. 변변한 놀이터도 하나 없던 시절 팽나무에 올라가거나 그 주위에서 자주 놀았다. 초여름 매미가 울기 시작할 무렵 요즘 장난감 총 '비비탄' 크기의 풋풋한 파란색 열매를 이용해 팽총 놀이를 했다. 이대와 같은 작은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 버리고 대롱 끝에 열매 한 알 밀어 넣고 다른 한쪽에다 대나무 꼬챙이로 열매를 밀어 넣으면 대롱 안에 압축된 공기에 의해 반대쪽의 대롱 속 열매가 '팽' 하고 튕겨 날아간다. 팽총의 탄환인 '팽' 열매가 열리는 나무란 뜻으로 팽나무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說)도 있다.

최근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에 팽나무의 인기가 높다. 하지만 전원생활과 거리가 먼 도시인들은 팽나무를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월포리의 팽나무.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월포리의 팽나무.

◆정겨운 다른 이름 '포구나무'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의 낙엽교목으로 키 20m, 줄기 둘레가 두세 아름이 넘게 자라는 큰 나무다. 수백 년의 나이가 들어도 껍질이 울퉁불퉁하게 갈라지지 않고 비교적 매끄럽다. 뿌리가 튼튼하게 잘 발달하여 우리나라 햇볕이 많이 드는 어디서나 토양을 크게 가리지 않고 성장한다. 팽나무는 늦봄에 자그마한 꽃이 지고 나면 이내 초록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열매는 가을에 황적색으로 익으며 숲속 새들 먹이로 이용된다. 달짝지근한 맛이 나며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에는 아이들의 주전부리가 되기도 했지만 먹을 게 거의 없어 허기를 달래는 데는 도움이 못 된다.

경북에서 부르는 팽나무의 또 다른 이름은 '포구나무'다. 배가 들락거리는 갯마을 포구(浦口)나 강가 나루터에 한두 그루가 서 있기 때문에 '포구에 있는 나무'를 줄여서 '포구나무'로 불렀다. 나무의 특성은 물론 자라는 환경을 떠올릴 수 있는 '포구나무'라는 토박이말이 팽나무라는 표준말보다 훨씬 더 정겹게 느껴진다. 염분이 많은 갯바람에 잘 견뎌서 동해안 마을에는 당산나무로 보호되는 팽나무가 많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 주막촌의 랜드마크인 수령 500년 팽나무.
대구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 주막촌의 랜드마크인 수령 500년 팽나무.

◆사문진 나루터 지킴이 팽나무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사문진의 옛 나루터에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는 주막촌의 명물이다. 밑둥치의 둘레가 5m에 가까운 보기 드문 노거수다. 지금이야 사문진의 큰 다리가 건설돼서 낙동강을 쉽게 건널 수 있지만, 배에 물자를 실어 나르거나 사람을 태우고 강을 건너던 옛날 나루터는 교통과 물류 거점이다. 사문진(沙門津)의 지명에 진(津)이 들어간 것은 배들의 왕래가 많음을 의미한다. 사문진의 팽나무는 주막 입구에 있었으나 하마터면 200만원에 팔려 나갈 뻔했다. 4대강 사업으로 주변을 정비하자 주인이 팔려고 조경업자와 매매 계약했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은 달성군 관계자들이 조경업자를 설득했고 계약을 무산시켜 나무는 제자리를 지키게 됐다. 팽나무는 복원된 주막의 터줏대감이자 옛 사문진 나루터의 랜드마크로 거듭났다.

원효의 탄생지로 알려진 경북 경산시 진량면 제석사 경내의 팽나무.
원효의 탄생지로 알려진 경북 경산시 진량면 제석사 경내의 팽나무.

◆수령 200년 넘는 나무 수두룩

팽나무는 사람의 수명보다 훨씬 오래 산다. 나이가 100, 200살 넘는 노거수가 전국에 수두룩하다. 대구경북에서 보호수로 지정된 팽나무만 해도 100여 그루나 된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비록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정자나무도 많다.

과일나무가 아닌 탓인지, 목재로 쓰임이 뚜렷하지 않아서 그런지 우리 옛 문헌에서 팽나무의 존재를 찾는 게 쉽지 않다. 조선 숙종 때 홍만선이 펴낸 『산림경제』의 「치포」(治圃)에 실린 '버섯 양식하는 법[生蕈菌法]'에는 "소나무, 팽나무(彭木), 참나무에서 나는 버섯은 독이 없다"라는 내용이 나오지만 나무의 재배나 식목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없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보면 평사리 최참판댁의 공간과 계절을 묘사하는 부분에 팽나무가 나온다.

안채와 별당 사이에 한 그루 서 있는 팽나무 속에서 우는 걸까. 찢어지게 공간을 흔들며 매미가 운다. 병수는 글을 읽다가 얼굴을 든다. 하늘에는 덩어리를 이룬 새하얀 구름뭉치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백성들의 삶과 함께 자란 팽나무는 농경사회에서 기후를 가늠할 수 있는 나무로 통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던 옛날 봄에 가지에서 일제히 싹이 트면 비가 많아 풍년, 그렇지 못할 때는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경북 포항시 기북면 청두들 가운데 있는 팽나무.
경북 포항시 기북면 청두들 가운데 있는 팽나무.

또 팽나무는 풍수지리설에 따른 비보림(裨補林)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防風林) 역할을 하며 마을 주위를 호위무사처럼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마을을 지켜 주는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동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당산나무도 상당수다. 나무를 베거나 해코지하면 재난을 당한다면서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한다. 대신 기도나 치성을 드리며 복을 비는 토속적 신앙과 뿌리가 닿아 있다.

천연기념물 팽나무 황목근의 후계목 황만수.
천연기념물 팽나무 황목근의 후계목 황만수.

◆재산세 내는 팽나무 '황목근'

경북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에는 재산을 가진 팽나무 '황목근'이 널찍한 들판 한가운데 우람하게 서 있다. 천연기념물인 이 나무의 나이는 600살로 추정된다. '황목근'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마을 공동재산인 토지를 팽나무 앞으로 등기 이전하면서 갖게 됐다. 5월에 황색 꽃이 피고 노란 열매가 열리기 때문에 황(黃)씨 성을 붙이고, 건강한 뿌리를 깊이 내려 오래 살라는 바람을 담아 목근(木根)이란 이름을 지었다.

황목근은 넓은 땅을 소유하고 1년에 4만5천원에서 5만원가량 세금을 납부한다. 논, 산, 마을회관 부지 등 황목근 이름으로 등기된 땅이 자그마치 4천여 평이나 된다.

주민들은 마을 수호목으로 신성하게 여겨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나무 옆 비석에는 '神靈干臨廣濟草木'(신령간임광제초목)이라고 쓰여 있는데 "신령이 계셔서 온갖 만물 생명들을 구제해 주신다"는 뜻이다.

한창때는 나무 높이가 15m에 이르고 약 2m 높이에 큰 줄기가 네 갈래로 뻗어나가 수관(樹冠)이 골고루 퍼졌지만 안타깝게도 몇 년 전부터 노화가 심해져 일부 가지가 시름시름 마르고 무성하던 잎이 성글 뿐만 아니라 수관도 상당히 왜소해졌다.

동민들은 일찌감치 황만수(黃萬壽)라는 후계목을 키우고 있다. 씨앗에서 자란 2세목은 아니지만 같은 뿌리에서 새로 돋아나온 움이 자라자 옮겨 심었다고 한다.

인근에 재산을 가진 소나무로 유명한 석송령이 있는 예천은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삶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초등학교의 팽나무.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초등학교의 팽나무.

◆나무 그늘은 마을 공동체 소통의 장

"어린 시절 저 나무 타고 안 논 사람이 없고, 기쁜 날 저 나무 아래에서 잔치 한 번 안 연 사람이 없고, 간절할 때 기도 한 번 안 한 사람이 없어요. 우리 마을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당산나무입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소덕동 이장이 현장 실사를 나온 변호사들에게 팽나무의 가치를 설명하는 말이다. 여기에 소환한 이유는 노거수가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 산실임을 절절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노거수 아래서 주민들이 살아가며 소통하고 그 속에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간다. 또 요정이나 도깨비라고 부르는 나무 정령(精靈)의 이야기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문화적 상상력의 밑거름이 됐다. '문화의 모태는 숲이요, 노거수는 언어다'라는 말을 대표적 정자나무인 팽나무를 보면서 실감한다. 하늘을 덮을 듯한 기품으로 마을 사람들을 한여름 넉넉한 그늘 밑에 모두 포용해온 나무이기에 찬사를 받을 만하다.

오늘날 동네 팽나무에게 부치는 헌사나 다름없는 이재무 시인의 「팽나무」 시 뒷부분을 마저 옮긴다.

지금도, 안부 챙기러 고향 갈 적에

반쯤 허리 숙인 채

죽은 엄니 살았을 적 손길로

등 두드리는

이 세상 가장 인자한 어른

기쁠 때 쏟은 한 말의 웃음

설울 때 쏟은 한 가마 눈물

뿌리로 가지로 쑥쑥 자라는

우리 동네 제일로 오래된 나무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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