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외교정책의 기본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큰 나라인 명나라는 섬기고, 일본 등 다른 이웃 국가들과는 친하게 지내는 게 기본 방침이었다. 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국체(國體) 보존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조선 최고의 리더' 세종도 예외가 아니다. 사신의 온갖 횡포를 받아준 결과 '한결같이 정성스러우니 탁월한 현왕(賢王)이라 할 만하다'는 명 선종의 국서(國書)를 받은 대목이 실록에 나온다. 물론 이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과 노론의 이념적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역설적인 것은 명도 조선을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주원장은 후손에게 남긴 황명조훈(皇明祖訓)에서 전쟁을 벌여선 안 되는 '부정지국'(不征之國) 가운데 조선을 첫 번째로 올렸다. 조선과 싸우는 틈에 몽골이 다시 일어서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다.
세종의 태실(胎室)이 있는 경북 성주가 다시 한중 관계의 열쇠 말이 됐다. 태실에서 차량으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사드(THAAD) 기지를 둘러싼 갈등이다. 미중 관계가 날로 악화하면서 한국을 미국 영향권에서 떼어 놓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중국은 최근 새로운 쟁점을 던지며 냉기류를 유발했다. 한국이 3불(不·사드 추가하지 않고, 미국 미사일 방어망과 미일 군사동맹 불참)에다 1한(限·사드 운용 제한)까지 공식화했다는 것이다. 사드 레이더가 자국의 전략 동향을 탐지해 안보를 위협한다는 논리다.
더욱이 중국은 지난 9일 양국 외교부 수장 면담 뒤 노골적으로 한국을 겁박하고 있다. 중국 측 발표문 '5가지 응당을 견지하라'(堅持五個應當·견지오개응당)는 명백한 주권 침해다. 구한말 우리 외교권을 침탈한 일제의 을사늑약마저 떠오르게 하는 수준이다.
'마땅히'(應當)란 단어로 시작하는 다섯 항목은 ▷독립 자주 노선 견지 ▷상호 중대 관심 사항 배려 ▷공급망 안정 수호 ▷상호 내정 불간섭 ▷다자주의 견지 등이다. 하지만 속뜻은 ▷미국 편향 탈피 ▷사드 문제 해결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불참 ▷대만 문제 개입 금지 ▷중국 중심 체제 동참 요구다. 정녕 조선시대로 돌아가 '사대'(事大)하란 것인가!
그런데 중국의 계산된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씨는 이상한 방향으로 튀고 있다. 국내 정파(政派) 간 대립의 확산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완용까지 언급하며 군사주권 포기가 실제로 있었는지 문재인 정부 관계자들이 털어놔야 한다고 나섰다.
문 정부가 무슨 꿍꿍이에서든 이런 '약속'을 해줬다면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을 밝혀낸다면, 오는 17일 새 정부 출범 100일을 앞둔 국민의힘으로선 국정지지율 20% 위기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다. 외세(外勢) 앞에 국민은 뭉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드 갈등 해법 마련은 뒷전인 채 정쟁(政爭) 대상으로만 삼을까 걱정이다.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 주변 정세가 엄중하기 때문이다. 2017년 '한한령'(限韓令)처럼 사드 갈등이 또다시 경제·사회·문화 분야로 번지도록 방치한다면 그야말로 대역죄(大逆罪)다.
미국의 대표적 동아시아 전문가였던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역저 '중국과 일본'에서 "미중 관계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설파했다. 그런 미국과 중국 틈새에 낀 한반도의 외교는 늘 위태롭기 마련이다. '5세 초등학교 입학' 같은 정책 실수가 되풀이돼선 결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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