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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면도칼 스윙보터

박지형 문화평론가

박지형 문화평론가
박지형 문화평론가

몇 해 전 20대가 주류인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끔찍한 사연을 본 적이 있다. 한 중학생 아들이 손이 크게 다쳐 피가 철철 흘렀는데, 어쩌다 다쳤나 물어보니 여동생의 지갑에 손을 넣었다가 면도칼에 깊게 베였다더란다. 부모는 당연히 딸에게 왜 지갑에 면도칼을 넣어놨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딸이 하는 말이 오빠가 자기 돈을 자꾸 훔쳐 가는데 아빠가 부당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사적 복수에 나섰다고 대답했단다. 사건이 있기 며칠 전, 딸은 아빠에게 오빠가 자기 돈 만 원을 훔쳐갔다고 울면서 호소했고, 아빠는 "내가 만 원을 줄 테니 오빠랑 화해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엄마가 딸에게 물었다. "넌 손해 본 것이 없는데 왜 면도칼을 지갑에 넣었니?" 그러자 딸이 울분에 차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난 손해를 보지 않았지만, 오빠는 만 원의 부당이득을 얻었잖아!"

누리꾼들은 이 이야기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며 각자의 의견을 개진했다. 쟁점은 이것이었다. ① 딸이 심했다. ② 아빠가 무책임했다. 이글의 읽는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떤가? 난 개인적으로 당연히 ①번이라고 봤다. 아빠가 조금 세심하지 못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저게 피까지 볼 사안인가? 내가 진짜 놀란 것은 여기서부터였다. 대다수의 20대 네티즌들이 ②번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처사를 잘못해서 저 사단이 난 것이고, 딸이 지갑에 면도칼을 꽂아 둔 것은 정당방위이며, 훔치려던 오빠가 다친 것은 오히려 사이다라는 것이었다.

②번을 고른 이들 모두가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이며, 나아가 향후 선거의 키가 되는 가장 핵심적인 스윙보터들이다. 이 세대들의 대다수는 확정된 정치적 정체성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어떤 통시적인 정치의식, 예컨대 박정희와 산업화를 그리워하며 보수를 찍고, 민주화 세대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민주당을 찍고, 그런 거 거의 없다는 거다. 이들의 표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최근 일 년, 한 달, 일주일,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불공정하게 대했나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청년들을 극한 경쟁에 몰아넣고 각자도생하라고 만들어 놓았으니 공정 이슈에 관해 이 세대가 보이는 민감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청년들 앞에 대고 "아빠가 페미니즘 줄 테니 박원순은 좀 넘어가주렴"이나 "아빠가 여가부 없애 줄 테니, 이준석은 좀 날리자"라는 이런 소리나 해댔으니 한쪽은 선거에 지고, 다른 한쪽은 지지율 쪽박을 받아든 것일 테다.

예리한 스윙맨들. 우리는 바보같이 충성 투표만 하다가 이렇게 늙었는데. 그래, 이제 너희들은 대한민국의 키를 쥐고 왔다 갔다 이리저리 멋지게 흔들어 보아라. 이 나라의 불공정과 부패가 모두 탈탈 털릴 때까지.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프냐? 그들이 더러운 손 뻗칠 곳에 면도칼 심어 놓고 기다리는 너희들, 몰리고 몰린 끝 그 마음의 궁지만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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