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 속에서 학교보다 더 오래된 것이 바로 '농사'다. 인류가 식량을 구하는 방식이 사냥에서 농사로 바뀌고, 정착 생활이 시작되며 비로소 문명이 꽃 피게 된다. 교육 수도 대구에서 탄생한 첫 공립 중등교육기관 역시 농사를 가르치기 위해 세워졌다. 도심 속 자연에 자리 잡고 있는 지역 최고(最古)의 학교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를 소개한다.
◆한복 위에 작업복 입고 밀짚 모자 쓴 학생들
대구 지역 중등교육기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이하 농마고)는 1910년 5월 10일 '대구공립농림학교'로 개교해, 같은 해 11월 대구공립농업학교로 개칭한다.
이 학교는 효율적인 영농법과 채소 재배법 등을 가르쳐 황폐한 농업과 임업을 발달시키고, 근로 정신을 높여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입학식은 속칭 향교요사(鄕校寮舍)라 불리는 곳에서 치러졌다. 당시 동본정(동인동 로타리 부근) 자리인데, 이때만 해도 시외곽지라 한적한 곳이었다.
같은 해 6월 대봉동 현 사대부속중고등학교 자리의 1만3천㎡(4천 평) 상당의 부지를 구입해 학교 실습지로 사용했다. 채소원, 정원, 기타 답작지 등이 들어서며 농업학교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게 된다.
대구농업학교의 제1회 학생 모집은 각 군수가 군 내의 수재를 선발하게 해 관찰도(觀察道, 조선 말기에 전국을 13도로 획정한 행정구역)에서 직접 원서를 접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과는 본과와 속성과로 2개가 있었는데, 본과는 농림업에 대한 전문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2년제로 운영됐다. 1년제인 속성과는 토지 측량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 임시 토지조사원을 양성하기 위해 마련됐다.
농마고 100년사에 따르면, 당시 본과 모집 정원은 50명, 속성과는 30명이었는데, 지원자 수는 각각 380명, 210명이나 몰릴 만큼 대구농업학교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대구농업학교 학생들은 채소, 과수재배, 보통작물, 축산학, 양잠(養蠶, 누에를 사육해 고치를 생산하는 일), 토양학, 농구학, 임업, 농업경제, 농산제조학, 병충해학, 측량 등 실업과목을 공부했다. 한문, 기하학, 물리, 화학 등 인문과목에 대한 교육도 이뤄졌다.
당시 한 학생에게 3평 규모의 토지를 배당해 책임지고 관리하게 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주는 작업복을 입고 머리에는 밀짚 모자를 쓴 채, 혼자서, 또는 조를 짜 공동으로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논에는 주로 벼, 보리, 밀, 헤아리벳지(털갈퀴덩굴) 등을 심었고 채소는 무, 배추, 파, 시금치, 상추, 감자, 마늘, 고추 등을 길렀다. 특용작물로 약초, 삼(麻), 우엉, 낙화생(落花生, 땅콩의 다른 이름), 당근 등도 심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매년 11월 대구농업학교만의 특별한 연중행사인 '농산물 품평회'에 자신이 한 해 동안 땀 흘려 생산한 농산물을 출품해 평가를 받았다. 교직원과 전교생이 한곳에 모인 자리에서 각 출품물에 대한 심사가 이뤄졌고, 1등부터 4등까지 선정해 상장을 수여했다. 품평회 행사의 꽃은 '시식회'였는데, 돼지고기, 감자, 시금치를 섞어 끓인 '돼지국'이 누구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한상 차려져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한편, 1928년 농업과와 임업과를 분리하며 대구농업학교는 대구공립농림학교로 개칭하게 된다.
◆임야에 울려 퍼진 애국가, 이삭에 맺힌 애국심
농림학교 학생이라고 언제나 농장에서 일만 하고, 현실 문제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됐는데, 농마고 100년사에 따르면, 이튿날인 4일 대구에서 가장 먼저 애국가(이별의 곡)를 부르며 선두에 섰던 것이 대구농림학교 학생들이었다.
이 때문에 1929년 12월 중순 17회 졸업생인 양인석 박사는 수원고농에 재학 중이다 방학을 맞아 대구로 왔는데, 대구역에서 하차하자마자 경찰 고등계 형사에게 끌려가 역전 파출소에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대구농림학교 학생들에게 가해졌던 단속의 연장선이었다.
3·1운동 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당시 대구농업학교 학생들 역시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학생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고자 결의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 교장과 교유(敎諭, 일제 강점기에 정식 자격을 가진 중등학교의 교원) 등이 교문을 막고 이를 제지해 거사가 저지되고 만다. 이 사건 이후 대구농업학교 전교생이 기숙사에 감금됐고, 학생들은 더 날카로워진 학교와 경찰의 감시와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1929년 광주학생 사건 이후 조선인 학생을 바라보는 사회적 눈초리는 나날이 날카롭고 험악해졌지만, 대구농림학교 학생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맞서 싸웠다.
1930년 재직 중이던 일본인 교사 나카무라 쇼죠(中村省三)는 특히 조선인 학생을 경멸하고 조선에 대해 굴욕적인 언행을 일삼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이에 대구농림학교 전교생은 같은 해 10월 10일 나카무라 선생이 교무실로 연락하러 가는 틈을 타 동맹휴학에 돌입하고 교문 앞에서 시가 행진을 시작했다.
도중에 경찰 헌병들이 동원돼 제지했으나 학생들은 막지 말라고 저항하며 중앙파출소까지 행진을 진행했다. 이후 학교는 학생들 사이에서 주동 인물을 적발해 임업과 3학년 손대용, 박금암, 권복인 학생과 농업과 양소도 등 모두 7명을 퇴학 처분했다.
이 일로 조선인 학생들은 평소 학교에서 교원들의 감시를 받는 것은 물론, 방학 기간에도 억압 속에서 지내야 했다. 방학 때 대구 시내에 거주했던 학생들은 교도연맹의 감시를 받았고, 타 지역 학생 역시 경찰이 명부를 작성해 관리했기 때문에 고향에 가 있는 동안에도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드넓은 땅만큼 큰 포부, 첨단농업 마이스터의 산실
험난한 역사 속에서도 휘어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벼처럼 버텨온 대구농림학교는 수차례 이전과 개칭을 거쳐오며 지금의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가 됐다.
현재 수성구 노변동에서 천혜의 자연 경관과 30만㎡의 넓은 대지를 보유한 농마고는 정문에서 후문까지 1.5㎞ 가량의 아스팔트 길 양쪽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펴, 봄이 되면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벚꽃 명소다.
아름다운 벚꽃길 외에도 농마고엔 자랑할 거리가 한가득있다. 농마고는 스마트팜, 식물공장, 프로젝트실습장, 식품분석실, 시설재배 과수원, 답작포, 조경포, 산업기계운전연습장 등 수많은 실습장을 갖추고 있어 미래 첨단농업분야 마이스터의 산실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2019년 12월 부지 내 마련한 영농마이스터지원센터(마이스터센터)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졸업생, 선도 농업인과의 연계를 통해 학교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저장, 선별, 포장, 판매, 유통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마이스터센터에는 창업육성부 교원과 취업지원관이 상주하고 있다.
마이스터센터에서 운영하는 '담쿱사회적협동조합'(담쿱) 역시 학생들의 창업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담쿱은 학생동아리에서 시작해 지난 2020년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됐다. 지역민과 학생이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함께 성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담쿱 학생들은 마이스터센터 내에 농산물판매생산장을 마련해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으며, 지난 5월 수성구 매호천에서 열린 '2022 가정의 달 맞이 마을축제'에 참가해 직접 재배한 채소를 지역 어르신에게 나누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윤철수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교장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6차 산업을 주도해 나갈 청년을 키워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윤 교장은 "112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 학교는 도시형 첨단농업을 견인하는 영농마이스터 양성을 목표로 한, 대도시에 있는 유일한 농업계 마이스터고로서 우리나라의 미래 농업을 이끌어갈 인재 육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꿈과 열정으로 농업의 미래를 꽃 피우는 학교를 비전으로 삼아, 모든 학생이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인재가 되도록 매진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올바른 인성과 농업기술을 겸비해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스마트첨단농업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인재를 배출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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